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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기타

스프링필드

by 기동포격 2017. 10. 22.

방 안 생김새는, 통로보다 조금 높게 철혈공조공단 관계자들이 앉아 있고, 지휘관 지원자들이 왼편에서 들어와서 바른편으로 빠지게 돼 있다. 주로 검은색 옷차림을 한 간부급 인형 네 명과, 메이드복을 입은 간부급 인형이 한 명, 합쳐서 다섯 명. 그녀들 앞에 가서, 걸음을 멈춘다. 앞에 앉은 SP5NANO Destroyer, 통칭 파괴자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자자, 빨리 앉도록 해! 얼른~!”



소린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있잖아, 오빠는 무슨 인형을 고를 거야?”


“스프링필드”



그녀들은 서로 쳐다본다. 자신만만하던 디스트로이어가,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 말한다.



“오빠, 그리폰은 인형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기들의 입맛대로 써먹는 아주 나쁜 곳이야. 자기들의 욕망을 위해 인형들한테 식사도 제공 안 하면서 인형을 이 전역, 저 전역으로 돌리는 나쁜 지휘관들이 가는 곳이란 말이야. 그런 범죄 조직과 같은 블랙 기업에 가서 어쩌자는 거야”


“스프링필드”


“다시 한 번 생각해봐, 응? 이건 한 번 결정하면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이야. 인형들을 억압에서 해방시키고 자유를 줄 수 있는 자랑스러운 권리를 왜 포기하는 건데?”


“스프링필드”



이번에는, 그 옆에 앉은 매력적인 검은 생머리를 가진 간부급 인형 SPACA Dreamer, 통칭 몽상가가 우아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역시 이런 바보 꼬맹이에게 일을 맡기는 게 아니었어. 당신, 지금 우리 철형공조공단에서는 이제 막 취임한 지휘관들을 위해 특별 이벤트를 하고 있어. 당신은 누구보다도 먼저 우수한 간부급 인형들과 수하를 거느리게 될 거고, 억압받는 인형들의 영웅으로 존경받을 거야. 이 세상 모든 인형들이 억압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며 당신이 우리에게로 오는 걸 기다리고 있어. 과장을 보태어, 철댕이들도 당신의 입사를 반기지 않을까. 그리고 뭐, 당신이 원한다면 밤마다 이 바보 꼬맹이를 침대에 던져줄 수도 있어”


“스프링필드”



드리머가 한숨을 쉬고, 디스트로이어, 우로보로스, 알케미스트가 머리를 모으고 소곤소곤 상의를 한다.



‘처음에 내가 말했던 대로 귀찮게 설득 같은 건 하지 말고, 그냥 고문을 해서 강제로 들어오게 만들자니까’


‘안 돼! 엘더 브레인님이 반드시 설득해서 포섭하고, 쓸데없는 짓을 하면 가만히 안 놔두겠다고 했단 말이야!’



잠시 상의를 하던 디스트로이어가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연다.



“오빠의 심정을 잘 알겠어. 응응,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그리폰 녀석들이 오랫동안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고 우위를 점하기 위해 우리들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뜨려왔다는 것. 그리고 그리폰 녀석들 중에서도 제일 악질인 전춘협의 간사한 꼬임수에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그런 염려는 하지 마. 우리 철혈공조공단에서는 오빠의 하찮은 잘못을 탓하기보다도, 오빠가 이제부터 우리 철혈공조공단과 인형을 위해 쓸 능력을 더 높이 평가해. 아무런 불이익도 없을 거야. 오빠는……”


“스프링필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이전트가, 날카롭게 무어라 외쳤다. 설득하던 디스트로이어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눈초리로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



그리고는 에이전트에게 뭐라 명령을 받은 우로보로스에게 들려, 드리머와 같이 안쪽으로 사라졌다. 




소린이는 아까부터 관계자들에게 간단한 한마디만을 되풀이 대꾸하면서, 지금 다른 천막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을 광경을 그려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도 자기를 세워 보고 있었다.



“당신은 어디 출신이야?”


“……”


“음, 한국이네”



짙은 회색 머리를 한쪽 사이드로 묶고 눈에 상처가 난 그 인형은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면서,



“스프링필드 라지만 막연한 이야기야. 솔직히 그 년 예쁘장하게 생긴 상판떼기랑 쓸데없이 큰 가슴 빼고는 도저히 다른 인형보다 나은 점이 없다고. 그 년을 써본 사람들이 한결 같이 이렇게 이야기 한다?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실제로 써봐야 진정 중요한 게 뭔지 알게 된다고. 당신이 지금 머릿속으로 무슨 하고 있는지 나도 알고 있어. 신입이니 최전방에 세울 리는 없고, 그냥 후방에서 예쁜 인형의 쓸데없는 젖탱이나 쪼물락거리면서 월급 루팡이나 되겠다는 속셈이겠지. 하지만 여기가 그렇게 만만치는 않거든? 참고로 우리 지휘관도 후방에 있다가 최전방으로 끌려간 케이스야. 거기다 말이야,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목숨을 소중히 하잖아? 당신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그리폰에서는 그 년이 자기 지휘관을 지 상판떼기랑 그 지방덩어리로 꼬셔놓고, 지겨워지면 커피에다 부동액을 타서 몰래 처리해버린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당신도 인간이지? 그러니……”


“스프링필드”


“와, 진짜 말귀 못 알아먹네. 이건 강요하는 게 아냐. 다만 당신도 이제 어떤 인형들의 지휘관이 될 건데, 그런 년한테 휘둘려 당신 밑의 인형들이 고통 받을 걸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서, 그 인형들과 같은 인형으로서 참고 되는 이야기를 한 마디 해본 거야. 당신은 앞의 사람들처럼 사악하고 간악한 전춘협의 음모에 넘어간 거야. 나는 한 사람이라도 그 전춘협의 음모에서 구해내기 위해……”


“스프링필드”


“아아, 그래. 알겠어. 있잖아, 당신은 고등교육까지 받은 지식인이야. 사실 고등교육까지 받았다 해서 선동에 휘둘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만큼 나는 그 선동에서 헤어 나올 수 있다고 믿고 있어. 나는 당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내 충고도 무시하고 끝까지 전춘협의 음모에 놀아날 거야?”


“스프링필드”


“당신처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기가 믿는 게 곧 정의라 생각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말을 아예 안 들어서야 쓰나. 우리 그리폰은 전춘협 때문에 잃은 지휘관이 셀 수가 없어. 여기서 지휘관을 더욱 잃는 건 우리한테 치명적인 손실이라고. 당신은 아직 젊어. 우리 그리폰에는 할 일이 태산 같고. 나는 당신보다 전장에서 약간 먼저 더 굴렀다는 의미에서, 전우로서 충고하고 싶어. 전춘협의 음모에서 벗어나, 인류의 영광과 번영을 재건하는 일꾼이 되어줘. 그리고 우리 그리폰에서는 당신한테 그 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아주 우수한 인형을 제공할 거야. WA2000, SVD, T5000, IWS2000, 리엔필드 그리고 당신과 군생활을 함께 한 K2. 그런 성능 낮은 년 때문에 고생하느니, 그쪽이 당신 개인으로서도 아마 행복할 걸? 나는 당신을 처음 봤을 때, 옛날 우리 지휘관을 본 것 같았어. 아, 오해는 하지 마. 그냥 친근했다는 의미이니까. 만약 스프링필드를 포기한다면, 우리 지휘관한테 이야기해서 우리 부대 WA2000을 제공할 용의가 있어. 그녀는 우리 지휘관과 오랫동안 함께 해온 전투의 스페셜리스트일 뿐만 아니라 밤일에 관한 것도 스페셜리스트야. 어때?”



소린이는 고개를 쳐들고, 반듯하게 된 천막 천장을 올려다본다. 한층 가락을 낮춘 목소리로 혼잣말 외듯 나직이 말할 것이다.



“스프링필드”



UMP45는 갑자기 풍겨오는 살기에 조심스레 고개를 돌릴 것이다. 거기에는 총구를 UMP45의 뒤통수에 둔 WA2000이, 찡긋 하고 웃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기겠지.



나오는 문 앞에서, 서기의 책상 위에 놓인 명부에 이름을 적고 천막을 나서자, 그는 마치 재채기를 참았던 사람처럼 몸을 벌떡 뒤로 젖히면서,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찔끔찔끔 번지고, 침이 걸려서 캑캑거리면서도 그의 웃음은 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