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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벽람항로

벽람항로 : 계기

by 기동포격 2020. 7. 20.

「역시 맛있어」



리펄스는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잔에서는 붉은 홍차가 김을 피어올리고 있었다. 마치 단풍을 연상시키는 듯한 옅은 붉은 차는 색깔은 물론 맛도 사람을 휘어잡기에 충분했다. 



「벨이 끓여준 차는 뭔가 특별하단 말이야」


「당연합니다. 주인님을 위해 최상급 재료만을 모아 끓인 차니까요. 찻잎뿐만이 아니라 물도 수돗물이나 지하수가 아닌 산 속에서 흐르는 1등급 물만을 엄선해서 길어왔습니다」


「아~, 지휘관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니까. 누구는 평소에 수돗물을 끓인 물에 싸구려 티백을 우려내어 마시는데 말이야~」


「티백은 놀라운 발명품. 기업이 어떻게 하면 간단하면서도 맛있게 차를 즐길 수 있을까 공들여 연구하고 노력한, 현대 문명의 정수입니다. 그 티백이 있기에 우리는 싸게 맛있는 차를 즐길 수 있지요. 결코 쉽게 볼만한 물건이 아닙니다」



벨파스트가 리펄스를 노려본다. 같은 진영의 소속원이었지만 차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렇게나 달랐다.



「자자, 현대 문명의 정수니 하는 괴상한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리펄스가 손을 흔들며 화제를 전환한다.



「그래서 벨이 화가 난 이유가…」


「저는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이유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요 거짓말쟁이!」



리펄스가 의자에서 뛰어올라 벨파스트의 볼을 잡아당긴다.



「거짓말을 하려면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지! 볼은 이렇게 부푼 데다 입술은 삐쭉 튀어나와있는데 화가 안 났다고!?」


「리, 리펄스님! 이게 대체 무슨!」


「자자, 인정하시지요. 지휘관한테 이 정성이 담긴 차를 대접 못해서 화난 거 맞잖아」


「……」



리펄스의 손을 떼어놓은 벨파스트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네. 리펄스님의 말이 맞습니다. 저는 주인님한테 약간의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메이드로서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이지만…저도 아직 많이 부족하군요」


「과장하기는…」



리펄스는 탁자에 놓여있던 잔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음미하며 차를 들이켰다. 입안에서 퍼지는 씁쓸한 맛이 일품이었다. 리펄스 개인적으로는 우유를 넣어 부드럽게 마시는 걸 좋아하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중앵 출신인 지휘관은 씁쓸한 맛을 선호한다고 한다. 아마 그래서 벨파스트도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홍차의 본질적인 맛을 즐길 수 있는 세팅을 했을 것이다.



「이 맛있는 차를 지휘관은 왜 마시지 않는 걸까?」


「……」



의문. 벨파스트가 이 모항에 착임한지도 어언 4개월이 지났다. 그 동안 벨파스트는 티타임이 되면 항상 차를 준비해 집무실로 갔지만, 그 때마다 허탕을 칠뿐이었다.



「웨일즈…웨일즈가 항상 선수를 친다?」


「그렇습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 줄여서 POW.  

이 모항의 비서함. 지휘관이 가는 곳에는 웨일즈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부터 시작해 지휘관이 잠에 들 때까지, 웨일즈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지휘관한테서 결코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다들 아카기, 다이호, 준요 같은 함선들을 지휘관에게 집착하는 주요인물로 삼아 주의하고 있었지만, 리펄스 개인적으로는 겉으로만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지휘관에게 가장 집착하고 있는 것은 프린스 오브 웨일즈라고 생각했다.



「4개월 동안이나 허탕을 쳤으면 그만둘 만도 한데, 하루도 빠짐없이 시간에 맞춰 방문하는 건 벨다운 걸?」


「그것이 메이드로서의 의무니까요」


「지휘관은 로열 쪽 사람도 아니니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텐데…」


「차라는 것은 국가와 인종을 막론하고 즐겨야 하는 하늘이 내린 보배 같은 존재. 주인님의 출신은 전혀 중요치 않습니다」


「헤에~」



리펄스는 벨파스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적당히 반응을 해줬다. 



‘벨 이 아이도 웨일즈처럼 어딘가 꽉 막힌 구석이 있단 말이야. 이건 로열 네이비의 특성인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둘뿐만이 아니었다. 함대에 메이드대까지 굳이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로열 네이비는 이상한 곳에서 고집을 부리는 경향이 분명 있었다. 



「그래서 실례인 것을 알지만서도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아, 뭔데?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대답해줄게」


「감사합니다. 그럼 감히 여쭙 건데, 제가 알기로 웨일즈님과 리펄스님은 사이가 좋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뭐 그렇지? 일단 전생에서의 인연도 있으니까. 전생에서는 마지막을 함께 했었고, 현생에서도 지휘관의 배려 아래 한 조로 묶여 활동하는 때가 많으니까」


「또 웨일즈님은 사쿠라 엠파이어 분들을 꺼려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지. 건조 된지 9개월 밖에 되지 않은 최신예 전함이었던 웨일즈를 침몰시켰고, 그로 인해 로열 네이비의 명예가 박살나버렸으니까. 뭐, 그래도 많이 나아진 편이야. 요즘은 스스로 중앵의 문화를 즐기는 수준까지 왔으니까. 혐오에서 꺼려한다는 수준까지 내려온 건 장족의 발전이지」


「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생깁니다. 주인님 또한 사쿠라 엠파이어 즉 중앵 출신인데, 웨일즈님이 주인님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아주 충성심 높은 강아지지. 지휘관이 웨일즈에게 자침하라고 하면 바로 탄약고를 폭파시키고 자침하지 않을까?」


「그것은 너무 과장인 것이…」


「아니, 분명 그래」



리펄스는 다시 한 번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이미 많이 식어 미지근해진 차. 이 차와 마찬가지였다. 불같이 뜨거운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성향도 지휘관 앞에만 가면 이렇게 미지근하게 변해버렸다. 



「그래서 신기합니다. 중앵을 꺼려하는 웨일즈님이 어떻게 중앵 출신인 주인님에게는 그렇게 충성을 바치는지 말입니다」


「음…」



벨파스트의 말을 들은 리펄스가,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진다. 아마 이 모항의 웨일즈가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일 것이었다. 얼마 전 다른 모항의 웨일즈가 이곳을 방문 했을 때는 중앵 출신인 지휘관을 보고 꽤나 격렬한 반응을 보였으며, 그로 인해 이 모항의 웨일즈와 다툼을 벌이기까지 했다. 다른 모항의 웨일즈는 중앵 출신 지휘관과 함선들을 두둔하는 이 모항의 웨일즈를 보고 로열의 수치라며 비웃기까지 했다. 리펄스는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웨일즈의 14인치 4연장 주포 2기가 다른 모항의 웨일즈를 향해 아주 천천히 돌아가던 모습을. 콩고가 말리지 않았다면 다른 모항의 웨일즈는 분명 그 자리에서 격침당했을 것이다.


물론 이 모항의 웨일즈가 그렇게 변한 것은 어떠한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상관없나. 딱히 기밀에 붙여진 것도 아니고」


「리펄스님?」


「벨, 일단 차 한 잔만 더줘. 그 다음에 내가 네 의문을 말끔하게 해소해 줄게」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과를 더 가져오겠습니다」



○●



미안. 솔직히 말하면 날짜까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나. 하지만 여름이라는 건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어느 여름날이었지. 정말 더운 날이었어. 

그 날 우리에게 임무가 내려왔어. 서태평양으로 향하는 수송선 25척으로 이루어진 선단을 호위하라는 임무였지. 맞아. 지금도 행하고 있는 선단 호위 임무야. 하지만 그 때와 지금이랑은 좀 차이가 있어. 지금은 경항공모함까지 동원하며 굉장히 엄격하게 이루어지는 임무지만 당시만 해도 아니었어. 선단 호위 임무는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은 풋내기들이나 나가는 임무, 지겨운 임무, 쉬러가는 시간 그런 인식이 강했지. 


당시 임무를 위해 지휘관이 편성한 함대는 착임한지 얼마 안 된 웨일즈와 나 그리고 아야나미를 포함한 구축함 4척. 여기에 지휘관까지 따라가게 됐는데, 임무를 하면서 항해 훈련까지 겸하기 위해서였어. 그래. 호위라는 임무에 집중하지 않고 딴 일정까지 넣을 정도면 선단 호위 임무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지.   


아, 생각나네. 그 때 웨일즈가 얼마나 의욕에 넘쳤는지. 처음으로 해보는 호위 임무인데다, 중앵 출신인 지휘관에게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존재인지 보여주겠다며 벼르고 있었지. 응, 맞아. 당시만 해도 웨일즈는 지휘관을 끔찍하게 싫어했어. 지휘관이 없는 곳에서는 왜 저런 미개인이 지휘하는 곳에 왔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했었으니까. 음? 우리가 살던 시대가 그랬었지. 그때는 아시아가 미개하다는 인식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임무를 나가게 됐고 수송선단을 인수인계 받아 호위 임무를 시작했어. 도중에 실시했던 훈련에서 웨일즈는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지. 9개월 만에 침몰하기는 했지만 당시 최신예 함선이었고, 인도양까지 항해를 해본 웨일즈한테 있어서는 뭐, 어려운 훈련은 아니었을 거야. 지휘관도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어. 그렇게 칭찬할 수준까지는 아니었는데, 일단 자신을 싫어하는 웨일즈에게 좋은 인상을 주자고 생각했을 게 틀림없을 거야. 웨일즈도 기분이 좋아 지휘관 말을 잘 들어줬었고.


그렇게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어. 날은 맑았으며 바다도 잠잠했고 훈련도, 호위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 우리는 마음을 놓고 있었어. 이대로 아무 일도 없이 끝날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 그래서 발견하지 못했던 걸 거야. 멀리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던 수상정찰기 한 기를.


호위 임무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 우리는 완전히 풀려 있었지. 솔직히 말해 그 때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어. 경계도 전혀 하지 않았지. 좀 있으면 이 지겨운 임무도 끝난다는 마음에 완전히 풀어져 있었어. 왜 그랬냐고? 사실 그건 경험에 기반을 둔 행동이었어. 애초에 우리가 선단호위 임무를 가볍게 보았던 건 선단이 습격을 받은 일이 없어서 그랬던 거야. 2차 대전쟁 때 중앵은 좋은 잠수함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철혈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처럼 적극적으로 선단을 말려 죽이려 한 적은 없었거든. 2차 대전쟁 때도 그랬고, 지휘관도 중앵 출신으로서 그런 교육은 받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생각을 못했던 거야. 그리고 또 하나는 웨일즈의 존재. 웨일즈는 중앵이 두려워하던 존재였어. 2차 대전쟁 당시 중앵은 중순양함으로 웨일즈를 상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며, 중앵의 주력 전함인 콩고급, 후소급, 이세급으로는 주간 전투에서 웨일즈를 이길 수 없다 여겼었거든. 즉 대규모로 선단 공략을 했던 전례가 없었다는 점과 웨일즈의 존재가 방심에 방심을 거듭하게 만들었지.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게 있었어. 그건 바로 중앵과 철혈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던 2차 대전쟁 때와는 달리 지금은 중앵과 철혈이 협력을 할 수 있는 상태인데다, 많이 부족하기는 했어도 중앵은 세계 3위 수준의 해군 강국이었다는 걸 말이야. 나중에 알게 됐는데 중앵은 철혈에게 선단 습격의 중요성과 그 방법을 철저하게 교육받았다고 해. 그리고… 우리가 그 첫 희생양이었고.



「좌현에서 어뢰접근 중!」



 비몽사몽하며 전진하던 도중 갑자기 보고가 들어왔어. 선단 좌측에서 호위하고 있던 폭스하운드가 보낸 거였지. 뭐, 그건 보고가 아니라 이미 비명에 가까웠지만. 순식간에 상황은 비상사태에 돌입했고, 우리들은 급히 변침하며 회피 기동에 들어갔어. 하지만 수송선에 맞춰 20노트도 안 되는 속도로 항해하던 우리가 52노트의 속도로 돌진해오는 어뢰를 피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지. 


결국 8발의 어뢰 중 2발이 웨일즈, 3발이 각각 수송선에게 명중했어. 장갑과 어뢰 방호구역을 갖춘 웨일즈는 버틸 수 있었지만, 수송선들은…응, 맞아. 명중 되자마자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며 빠르게 침몰해버렸어. 승무원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안 들 정도로 빠르게 말이야. 



「모든 함 대잠경계 최대로! 좌현 80도 경계!」


「웨일즈, 괜찮아!?」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요. 하지만 수송선이…」



그렇게 우리가 부산스럽게 소란을 떨고 있는 동안, 바위섬에 숨어있던 중앵 함선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어. 곧 우리 쪽을 향해 조명탄이 터지고 포격이 날아오기 시작했지. 



「지휘관, 어떻게 하지!?」


「침착해. 섣불리 움직이는 건 금물이야」


「뭐가 섣부르다는 건가! 이미 적의 포격은 시작됐다고!」



지휘관과 웨일즈가 아옹다옹하는 소리가 들려왔어. 곧바로 반격을 하자는 웨일즈와 일단 지켜보자는 지휘관이 충돌하고 있었어. 당시에는 기다리라는 지휘관의 결정을 이해 못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이유가 있긴 하더라고. 중앵의 전투함은 화력이 우선이며 화력을 제외한 다른 부문, 특히 명중률에 관해서는 많이 부족한 면이 있었다고 해. 중앵에서도 노력을 많이 하긴 했는데,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긴 했나봐. 거기에 야간이라는 상황이 겹쳐 적은 우리를 쉽게 보지 못하고, 우리도 주변의 동향을 알 수가 없으니 지켜보자는 거였지. 중앵 출신이라 그런 면까지 알 수 있었던 지휘관은 그래서 침착할 수 있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그래도 괴짜인 것은 틀림없어. 명중률이 낮다고 해도 언제든 럭키샷이 터질 수 있는 게 해전인데 그렇게 침착할 수 있다는 게 믿겨져? 기습까지 당한 상태였는데 말이야.



「지휘관!」


「난 기다리라고 했다, 웨일즈!」


「큭!」



웨일즈로서는 열불이 났겠지만 어쩔 수 없었지. 일단 계급에서 밀리잖아? 우리는 지휘관의 명령대로 적 머리 위로 조명탄만을 날리며 대기하고 있었어. 잠시 침묵이 흐르던 채널에 얼마 안 있어 지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살펴본 결과 적의 전력은 전함 2척과 소수의 경순양함, 다수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적은 고속함 위주 편성인데다 우리는 수송선까지 끼고 있기 때문에 후퇴라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다」


「수송선단은 일단 이곳을 벗어나도록. 호위는 구축함이 맡는다. 대잠경계를 철저히 하기 바란다. 웨일즈와 리펄스는 수송선이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날 수 있도록 시간을 끈다」


「그리고 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아군 함대에 도움을 요청하러 가보겠다. 이상」


「지휘관!?」



그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웨일즈가 경악하던 그 목소리를 말이야. 아마 다시는 못 들을 거야. 지휘관의 말은 요약하면 이러했지.



 ‘나와 수송선단은 도망치겠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시간을 끌다 죽어라’



아니, 지휘관의 명령은 틀린 게 없었어. 그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송선을 최대한 살려 보내는 거였고, 지휘관은 고급지휘관이었으니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맞았지. 고급지휘관을 잃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배를 잃는 것보다 더 큰 타격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음…그런 거 있잖아?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 있어도, 감정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것. 눈앞에서 대놓고 도망치겠다고 선언한다면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더라도 황당할 수밖에 없지. 그 때 채널을 통해 웨일즈의 온갖 욕지거리가 들려왔는데…웨일즈의 명예를 위해 이건 말하지 않을게.  


하여튼 지휘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웨일즈에서 아야나미로 갈아탄 뒤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어. 우리는 남겨진 채 황망해 하고 있었고. 하지만 그곳은 이미 전장. 멍하게 있을 시간이 없었지. 중앵 함선들이 쏘아대는 포격이 점점 정확해지고 있었거든. 



「…전생에도 그러했는데 이번에도 중앵 때문에 뜻을 펼치지 못하고 생을 다하게 되는군요. 거기다 중앵 출신 아군이 믿음까지 저버리다니…여러모로 최악입니다」


「웨일즈…」


「하지만 이번에는 허무하게 가는 것이 아닌 임무를 다하며 죽는다는 것이 만족스럽습니다. 그리고…다시 한 번 마지막을 같이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 



우리는 마음을 다잡고 적을 향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어. 우리의 마지막 임무를 다하기 위해. 결코 우리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얼마나 싸웠을까. 

당시에는 정말 오랫동안 싸웠다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20분 가량 전투를 벌였다고 해. 우리가 싸우는 동안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하며 해가 점점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어.

우리는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었지. 웨일즈는 후방 포탑이 정확하게 관통당하면서 화력이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이곳저곳에 포탄이 명중해 함교고 연돌이고 멀쩡한 게 없었어. 나 또한 어뢰를 한 발 얻어맞고 필사적으로 복구하며 대항하고 있었어. 하지만 적의 포탄이 웨일즈의 연장포와 나의 후방 포탑을 꿰뚫는 순간 전투는 사실상 끝이 나버리고 말았어. 휘청거리는 우리를 놓치지 않고 적은 포탄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우리는 어떻게든 치명상만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회피하기 시작했지. 속도가 느린 선단은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테고, 시간을 끌려면 일단 움직일 수는 있어야 했으니까. 아직도 생생히 기억해. 우리를 완전히 끝장내기 위해 적의 수뢰전대가 이쪽으로 변침하던 모습을 말이야. 웨일즈가 악에 받혀 마지막으로 충각이라도 하기 위해서, 적 함선을 향해 변침하고 돌진하려 하던 그 순간 



콰앙!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



적 전함,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지휘관이 히에이랑 키리시마였다고 하더라? 하여튼 히에이 옆에 있던 적의 구축함이 갑자기 포탑을 돌려 히에이의 함교를 가격하더니 히에이를 향해 어뢰를 뿌려버렸어. 그리고는 급히 변침하더니 히에이 옆에 있던 키리시마에게도 어뢰를 뿌렸고. 워낙 가까이 있었던 터라 적 전함들은 상황파악도 하지 못하고 회피기동을 할 새도 없이 어뢰를 모두 얻어맞고 말았지. 히에이는 그 자리에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하기 시작했고, 키리시마는 기관실이 망가져 말 그대로 떠다니는 강철의 관이 되어버렸던 거야. 


갑자기 일어난 일에 적 함대는 혼란에 빠졌어. 히에이와 키리시마에게 어뢰를 뿌렸던 그 구축함은 곧 적의 함대 사이사이를 누비며 이리저리 포탄을 쏟아내기 시작했어. 적 함대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겠지. 같은 편 구축함이 갑자기 전함에게 어뢰를 뿌리더니 자신들을 향해 포격을 해왔으니까. 


아~, 정말 용맹했어. 마치 보병 사이를 누비는 기병처럼 그 구축함은 적 함대를 농락했어. 우리가 갑자기 일어난 그 일에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채널을 통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어.



「멍청하게 뭐하고 있나! 빨리 도망쳐!」  



지휘관. 도망친 줄 알았던 지휘관이었어.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지. 지금 적 함대 사이를 누비고 있는 구축함이 아야나미랑 지휘관이었던 거야. 상상이나 했겠어? 도망친 줄 알았던 지휘관이 어둠을 틈타 적 함대로 숨어들었고 그 사이에서 같은 편인 척 하고 있었다는 걸? 


곧 정신을 차린 적의 함대는 아야나미에게 집중 포격을 하기 시작했어. 아야나미가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회피하면서 적에게 포격을 내뿜는 광경은 장관이었지. 별명이 왜 귀신인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어. 응?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음…사실 그 때 후퇴하고 있었어. 우리도 도우려고 했었고, 웨일즈도 지휘관을 절대 혼자 놔두고 갈 수 없다 고집을 부렸는데…지휘관이 이 주변에 항공모함이 있으면 어쩔 거냐고, 날이 완전히 밝으면 개죽음만 당한다며 역정을 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후퇴했어. 


그렇게 후퇴하던 도중 아군 함대를 만나 우리는 보호받으면서 가까운 모항으로 후퇴할 수 있었어. 지휘관의 연락을 받고 우리를 도우러 오던 함대였지. 다만 이쪽도 호위 임무의 인수인계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함대라 전력 자체는 빈약했기에 지휘관을 구하러 갈 수는 없었어. 


우리는 무력했지. 그렇게 무력감을 느낀 건 전생에 침몰할 때 이후로 처음이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방파제에서 지휘관을 도우러 가는 함대를 배웅하는 것 밖에 없었어. 우리 모항이었다면 배에 타서 따라가겠다고 고집이라도 부렸겠지만 다른 모항에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



「리펄스 언니…괜찮을까요? 그는…」


「웨일즈…」


「저는…저는 그에게 사과해야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이런 건 줄 알았다면…한 마디 말이라도 해줬다면…」


「결코…결코 그런 말들을 입에 담지 않았을 텐데…죽어버리라는 저주 대신…생환을 빌어줬을 텐데…」


「대체…어찌해야…이대로 돌아오지 못한다면…저는 어찌해야…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주저앉아 울기 시작한 웨일즈에게 내가 해줄수 있는 건 안아주는 것뿐. 그렇게 웨일즈는 그 모항의 지휘관이 올 때까지 울었어. 세상에서 제일 서럽게.



○●



「그러한 일이 있었군요. 저기…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쭈어도 괜찮은지요?」


「물론. 아직 이야기는 안 끝났으니까」


「지휘관을 도우러 갔던 함대는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어. 그 동안 웨일즈가 어떤 반응을 보여줬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을게」


「그렇게 늦어졌던 이유는?」


「아무래도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적의 전력을 주의하며 돌입했나봐. 항공모함까지 동원해 철저하게 훑어가며 천천히 전진한 거지」


「도착했을 당시 아야나미 주위에 적은 없었다고 해. 키리시마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거기서 아카시가 긴급히 수리를 한 뒤 예인해서 온 거야」



거기까지 말한 리펄스는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인되어서 온 아야나미는…끔찍했어」


「함수가 날아가서 보이지 않았지. 함교에서 선수까지. 주포를 포함해 전부 날아가 버린거야. 아카시가 한 긴급수리라는 것도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게 막은 것일 뿐…침몰하기 않은 게 신기한 수준이었어」


「……」


「솔직히 말하면 난 그걸 본 순간 모든 게 끝장났다 생각했어. 함교도 반은 날아가 버리고 없었거든. 아야나미의 그 모습을 본 웨일즈는…주저앉아서 멍하게 쳐다볼 뿐…」


「하지만 살아남았다?」


「그래. 지휘관 다른 건 몰라도 악운은 굉장히 강한가봐. 머리에 심한 출혈과 몸 이곳저곳이 부러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살아남았거든」


「그때부터였던 거지. 웨일즈가 지휘관에게 묶이게 된 건. 그리고 벨도 알다시피 그것은 운명처럼 호감으로 바뀌고 더욱 발전해 사랑으로…켁!」



리펄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머나」



어느새 왔는지 웨일즈가 리펄스 뒤에 서 있었다. 웨일즈가 양손에 더욱 힘을 주며 리펄스의 관자놀이를 압박하자 리펄스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야야야야야야!」


「사람이 없는 곳에서 없는 이야기까지 지어내며 사람의 치부를 이야기 하다니…아무래도 제가 사람을 잘못 본것 같네요. 이거 저의 명예를 위해 결투라도 신청해야 할까요?」


「앗! 난 사양하겠어!」



결투라는 말에 리펄스는 벌떡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빠른 속도로 복도를 주파하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뛰지 마세요!」


「흥이다! 그때 울었던 거 지휘관한테 다 말해버릴 거야!」


「리펄스 언니!」



무서운 기세로 복도를 달려가는 리펄스를 보면서 웨일즈는 한숨을 쉬었다.



「왜 이 모항에는 로열 네이비의 명예를 생각하는 자가 없을까」


「그래…이건 전부 지휘관 때문이야. 그 사람부터 나태하니 모항에 있는 모든 함선들이 영향을 받는 거야. 역시 지휘관부터 고쳐서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해. 대체 어떻게 해야 그 버릇을 고칠 수 있을까. 최면, 약물, 고문…어떤 수를 써야 가장 효과적일까…」


「저기…웨일즈님?」



어두운 기운을 내뿜으며 불온한 단어들을 중얼거리는 웨일즈. 벨파스트는 그런 웨일즈의 모습을 보고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조심히 말을 걸었다. 웨일즈급의 함선이 자신의 방을 방문했다는 것은 분명 그 이유가 있을 테니까.



「웨일즈님이 굳이 이곳까지 발걸음을 옮기셨다는 것은 용무가 있어 오신 것 아니십니까?」


「아, 맞다」



벨파스트의 말을 듣고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는 웨일즈.



「사과를 드리러 왔습니다」


「사과?」


「아무래도 제 행동이 벨파스트님에게 무례를 범한 것 같은지라…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웨일즈를 보며 벨파스트는 크게 당황했다.



「아니에요! 고개를 들어주세요!」


「제 사과를 받아주신다면…」


「네, 넷! 받아들이겠습니다! 받아들이겠으니 어서 고개를 들어주세요!」


「감사합니다」



웨일즈가 고개를 들자 벨파스트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로열 네이비 안에서도 최고급 함선이었다. 거기에 지금은 지휘관의 신뢰까지 듬뿍 받고 있는 상황. 웨일즈가 가진 권력은 그 고귀한 태생과 지휘관의 후광에 힘입어, 어쩌면 퀸엘리자베스와 킹조지 5세를 능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코 자신과 같은 경순양함에게 고개를 숙일만한 계급도, 함선도 아니었다. 



「앞으로는 티타임에 시간을 내어드리겠으니 벨파스트님께서 지휘관을 보좌하시길 바랍니다」


「구,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아니요. 이것은 지휘관의 명령입니다」


「주인님의 명령…」


「사실 아까 혼이 조금 났답니다.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니냐고」


「주인님께서 웨일즈님을?」



벨파스트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보통 모항의 인원들이 보는 모습은 웨일즈가 지휘관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지휘관이 그 잔소리를 피해 도망가는 모습. 그 반대의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고, 그럴 거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저도 사실 많이 혼난답니다. 물론 저의 명예를 위해 사람이 없는 곳에서 지휘관이 혼내는 것일 뿐」


「솔직히 말하면 지휘관과 관련 된 것은 양보하기 싫습니다만…명령이라니 어쩔 수 없지요」


「웨일즈님은…」


「네?」


「웨일즈님은…주인님에게 강하게 집착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제 의견이 틀렸습니까?」


「…아니요, 맞습니다. 정확히 보셨어요. 어쩌면…아카기나 다이호보다 제가 더 지휘관에게 집착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웨일즈는 그렇게 말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벨파스트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는 온갖 감정이 넘칠 것 같이 담겨 있었다.



「벨파스트님도 리펄스 언니에게 들었을 것입니다.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지휘관이 어떠한 행동을 보여줬는지…」


「아직도 가끔 꿈에서 나온답니다. 그 날, 저의 부끄러운 모습이…저의 폭언에도 아무런 말없이 묵묵히 함교를 떠나던 지휘관의 뒷모습이…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아야나미의 함미가…」


「악몽도 꾼답니다. 결국 돌아오지 못한 지휘관…싸늘한 시체로 돌아온 지휘관…침몰해버린 아야나미…붙잡혀 중앵으로 끌려간 지휘관」


「저는…도저히…그 사람을 혼자 놔둘 수가 없습니다」


「냉정해 보이지만 무모한 그 사람을…」


「놔두었다가는…그날과 같이…홀연히 사라져…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제발 목숨을 소중히 여겨줬으면 합니다…자신의 위치와 영향력을 생각해 쉽게 죽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벨파스트는 웨일즈의 그런 약한 모습을 처음 보았다. 툭 밀면 쓰러질 것 같은, 불면 사라져버릴 것 같은 나약한 모습. 항상 로열 네이비의 선두에서, 지휘관의 옆에서 함대를 조련하던 당당한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은 죄의식에 묶인 가련한 여성만이 벨파스트의 앞에 서 있었다.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군요」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지휘관만 관련 되면 이렇게 감정에 휩쓸리니까요」



웨일즈가 고개를 든다. 어느새 나약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순식간에 바뀐 그 분위기에 벨파스트는 자그맣게 감탄했다. 리펄스의 이야기 속에서는 감정적이고 오만하던 웨일즈였지만, 지금의 웨일즈는 그것을 어느 정도 극복한 듯 보였다. 아무래도 세월과 경험이 감정적이던 웨일즈를 많이 바꾸어 놓은 듯 했다. 



「그럼 앞으로 지휘관을 잘 부탁드립니다」



웨일즈는 그 말을 하고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는 웨일즈의 뒷모습을 보던 벨파스트는 문이 닫히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어째서인지 지휘관의 뒷모습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과연 제가 앞으로 잘 보좌 할 수 있을까요」



저 웨일즈의 마음에 들게 지휘관을 보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 벨파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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