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작/아이마스

2. 키타자와 시호의 우울(1)

by 기동포격 2020. 8. 21.

「따먹고 싶어」



욕망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표출하는 여성.



「동감이에요」



갑작스러운 발언에도 불구하고 당황하기는커녕 그것에 동조하는 여성.



「어머, 아직도 맛을 못 본 거야? 그 쫄깃함을? 한 번 맛보면 절대 못 잊을걸?」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여성.



「어? 어?」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전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여성.



「하아…」



이럴 줄 알았다며 귀를 막고 한숨을 쉬는 여성.



폭우가 쏟아지던 밤. 유쾌한 여성들끼리 모여서 즐기는 잠옷 파티.


그런 날이었다.






비가 내렸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는 가차 없이 지상을 때리고 있었다.



「하아…」



P는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이걸 어찌 해야 하나」



전면유리를 가득 덮은 빗물을 바라보며 P는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와이퍼가 빠르게 빗물을 걷어내고 있었지만, 걷어내는 속도보다 빗물이 유리를 덮어버리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눈을 가늘게 뜨고 어떻게든 앞을 보려고 하던 P는 이내 포기하고 백미러로 뒤를 살피기 시작했다. 


시즈카가 수건으로 시호를 닦아주고 있었다. 시호는 혼자 닦겠다며 칭얼거렸지만, 시즈카는 무조건 자신이 직접 닦아주겠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시즈카 너 이상해. 왜 저번부터 언니 노릇을 하려고 드는 건데?」


「빨리 안 닦으면 감기 걸리니까 그런 거잖아」


「아니, 그게 네가 닦아주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네가 닦아준다고 더 빨리 마르기라도 해?」


「괜한 소리 말고 빨리 뒤로 돌아. 앗, 봐봐. 시호 네가 고집을 부리니 뒷좌석이 다 젖었잖아」


「그게 왜 내 탓인데!?」



뒤에서 들려오는 다툼을 들으며 P는 피식 웃었다. 둘 중 한 명이 그냥 양보하면 될 텐데, 둘 다 상대방을 이기겠다며 한 치의 양보도 하고 있지 않았다. 시호와 시즈카의 싸움은 항상 이러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싸우지 않고 넘어갈만한 일도, 서로의 자존심으로 인해 크게 번지는 일이 많았다. 



「자, 이제 어떡해야 하나」



뒤에서 투닥거리는 두 사람에 대한 신경을 끄며, P는 다시 앞을 향해 집중했다. 마치 누군가가 양동이를 들고 유리창에 부어버리 듯 쏟아지는 빗물. 낮이라면 서행하면서 어떻게든 뚫고 갈 수 있을지 몰랐으나, 지금은 밤 10시. 도저히 앞이 어떤 상황인지 가늠이 가지 않았고, P 자신 혼자이면 몰라 아이돌을 태우고 이 비를 뚫고 가는 모험을 할 수도 없었다. 시간도 시간인데다 폭우의 영향 때문에 대중교통은 이미 멈춘 상황. 다시 한 번 백미러를 통해 시호와 시즈카를 본 P는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그 수밖에 없나…



「프로듀서?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으세요?」



시즈카가 핸들에 머리를 박고 신음을 흘리는 P를 보고 의문을 표한다. 시호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P를 보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잠시 고민거리가 있어서 그랬을 뿐이야. 걱정해줘서 고마워, 시즈카」


「고민거리라니…심각한 일인가요?」


「음…심각하다면 심각한 일이지?」



P가 손을 들어 전면유리를 가리킨다.



「너희들도 보다시피 지금 비 때문에 시야가 굉장히 좋지 않아」


「아…」



시즈카가 이해를 했다는 듯 신음을 흘린다. 시호와 투닥거리느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비는 자신들이 차로 이동할 때보다 더 거세져 있었다.



「나 혼자라면 모르겠는데, 너희들까지 태우고 위험을 감수하며 이 비를 뚫고 갈 수는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생각한 건데…너희들이 괜찮다면…」



P가 한 번 주저한다. 정말로 괜찮은 것인가? 과연 이 일로 인한 후폭풍이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는가?



「괜찮다면…?」



시호가 P를 보며 묻는다. 시즈카는 그런 시호를 보면서 의문이 들었다. 왜 시호의 눈은 반짝이고 있는 건가? 왜 그 눈에서는 기대감이 넘쳐흐르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내 방이 가까운데 그곳에 가서-」


「갈게요!」



P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호가 앞으로 몸을 내밀며 동의한다. 그 모습에서는 다급함까지 느껴졌다. 



「정말 괜찮아? 그래도 남자가 사는 방인데 거부감 들지 않니? 위험할 수도 있는데…나도 일단 남자인데 조심하는 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긴급사태니까요」


「오히려 제가 묻고 싶네요. 프로듀서씨는 자신이 프로듀스 하는 아이돌을 덮치는 그런 사람인가요?」


「절대 아니지」


「맞아요. 다른 남자였다면 거부감이 들겠지만 프로듀서씨니까 믿고 갈 수 있는 거예요. 그래요. 프로듀서씨를 믿으니까요. 맞지, 시즈카?」



시호가 시즈카에게 동의를 구한다. 시즈카를 보는 시호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말에 동의하라는 무언의 협박. 동의하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라는 암시. 시즈카는 그 눈을 보고 시호의 말을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마, 맞아요. 프로듀서라면 믿을 수 있어요」



시즈카가 그렇게 말하자, 시호가 시즈카의 등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잘했다는 시호의 제스처. 시즈카는 뭐라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시호가 짓고 있는 그 미소를 보니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너희들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시호와 시즈카가 동의하자 P도 결심이 섰다.



「그럼 일단 내가 가까운 편의점에 가서 비옷하고 사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우산 하나로는 어림도 없을 테고, 기껏 닦았는데 또 젖기는 싫을 테니까 말이야」


「네」



P는 차에서 내려 황급히 편의점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비가 워낙 강해 우산은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서둘러야 했다. 아이돌을 저렇게 놔두었다 몸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프로듀서로서 실격이었고, 그로 인해 스케줄에 차질이 생기면 사회인으로서 실격이었다. 최대한 서둘러야 했다.



○●



지붕 밑에서 P는 한숨을 쉬었다. 



「괜찮니, 애들아?」


「저는 괜찮아요」


「신발이 다 젖기는 했지만…이 정도는 뭐 상관없어요」



비옷까지 입었지만 세 사람은 푹 젖어있었다. 강한 바람과 빗줄기는 편의점에서 산 싸구려 비닐 비옷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안하다. 이게 내 능력의 한계라서」


「프로듀서씨도 이상한 걸 사과하시네요. 자연 앞에서 인간은 어차피 보잘 것 없는 존재에요. 이건 자연재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맞아요. 프로듀서는 최선을 다하셨어요」



시호와 시즈카가 건네는 다정한 말에 P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진다. 



「이제 내 방으로 가서 샤워를 하고 몸을 쉬게 하면 되는데…이대로 가면 죽도 밥도 안 되지」


「난 이대로 열려 있는 마트로 가서 너희들이 입을 속옷이랑 기타 필요한 물건을 사올게」


「프로듀서씨가 사준 속옷…」



시호가 얼굴을 붉혔다. 시즈카는 그 원인이 절대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또 오늘 저녁도 못 먹었으니 먹을 만한 것도 사오고…」


「우동」


「응?」


「우동을 먹죠」



P가 시즈카를 본다. 시즈카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비장했다. 



「비오는 날에는 역시 우동이죠」


「아니, 비가 오든 말든 맨날 우동을 먹으면서…」


「…시호…!」



시즈카의 강렬한 눈빛에 시호가 몸을 움츠린다. 아무리 시호라고 할지라도 우동과 관련된 시즈카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 그래. 일단 우동 재료를 준비해 올게. 그럼 시즈카」


「네」



P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시즈카에게 넘긴다.



「내 방이 몇 호인지는 알지? 난 다녀올 테니, 먼저 들어가서 샤워하고 몸을 따뜻하게 해둬」


「알겠어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럼 다녀올게」



P가 다시 빗속으로 뛰어간다. 그리고 그 뒷모습은 얼마 안 있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럼 갈까, 시호. 감기 걸리기 전에 우리도 빨리 몸을 따뜻하게 하자」



앞장 서는 시즈카. 하지만 몇 발자국도 가지 못하고 시호한테 팔을 잡혔다.



「시호?」


「……어디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는 거야?」



시즈카를 바라보는 시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눈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원앙 새끼를 노리는 길고양이 같은 눈빛이었다.



「넘어가다니…?」


「시즈카…네가 어떻게 프로듀서씨 방이 몇 호인지를 알고 있는 거야?」


「하루카씨도, 치하야씨도, 유키호씨도, 코토하씨도…지난 몇 년 동안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했지만 알아내지 못한 게 바로 프로듀서씨 방이야. 그 카렌씨조차 후각으로 프로듀서씨 방을 추적하려다 실패했어」


「나도 이리저리 노력했지만 결국 알아낼 수 없었고, 오늘에서야 프로듀서씨가 이곳에 산다는 걸 알게 됐어」


「그런데…그런 프로듀서씨 방을 시즈카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



아차 싶었다. 시즈카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프로듀서 바보!’



시즈카는 P를 원망했다. P가 너무 자연스럽게 열쇠를 넘겨주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반응을 했던 것이다. 옆에 시호가 있는 것도 잊고 말이다.


자신을 노려보는 시호의 눈빛을 피해 고개를 돌린 시즈카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이 오프 때 P와 함께 돌아다니고 있다는 걸 시호가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시호는 자신을 시어터 바닥에 묻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시호는 능히 그러고도 남을 여자였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시즈카. 머리 굴리는 소리가 지금 내 귀에까지 들리니까. 변명이나 거짓말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날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마」



시즈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시호와 이래저래 같이 지내 온지도 3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 동안 어쩌면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을지도 모르는 두 사람이었다. 이미 서로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이. 웬만한 거짓말은 탄로 나기 십상이었다.



「…와…」


「와?」


「…와 본 적이 있어…프로듀서가 감기에 걸렸을 때…우동을 먹고 싶다고 한 적이 있거든…그래서 만들러 와 본 적이 있어. 응, 그래. 그것뿐이야」



일단 거짓말은 아니었다.



「……」



시호가 눈을 가늘게 뜬다. 시호의 눈이 가늘어질수록 시즈카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지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정말 그것뿐이야?」


「그, 그래. 진짜 그것뿐이야. 시호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일은 없어!」


「……」



3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시즈카한테는 그 짧은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알겠어. 일단 믿도록 할게」


「후…」



시호의 말을 듣고서야 시즈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100% 신뢰하고 있는 건 아니야. 만약 방금 한 말이 거짓말일 경우 어떻게 될지는 알고 있지?」



시즈카는 그 말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자. 난 어딘지 모르니 안내해줘」


「응」



시즈카는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시호의 강렬한 시선이 등을 통해 느껴졌다. 앞장 서 걷던 시즈카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자신이나 시호나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평가도 그러했고 스스로의 평가도 그러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시호는 P가 관련이 되면 입사 초창기의 그 성격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그 때 보다 더욱 냉정해지고 더욱 날카로웠다. 시즈카로서는 대체 무엇이 시호를 그렇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이해를 할 수 없으니 답답했다. 


물론 시호가 P를 두고 어떤 사람들과 대립하고 있는지 시즈카가 알 수 있다면 이해를 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걸 모르는 이상 답답함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한 번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입사 초창기였다면 그냥 무시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친구 그 이상을 넘어 단짝이라고 칭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항상 투닥거리면서도 항상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이었다. P도 시즈시호 조합이라면서 두 사람을 같이 활동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알 수 있을 거야. 혹시 고민이 있다고 한다면 들어줘야지. 그게 친구이자 동료의 역할이니까’



시즈카는 주먹을 쥐면서 결심을 다졌다. 



○●



「응?」



복도를 걸어가던 시즈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시즈카를 따르던 시호도 같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시즈카?」



예고 없이 걸음을 멈춘 시즈카의 등을 보며 시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시호에 부름에 시즈카는 고개를 돌렸다.



「시호, 이상해」


「뭐가?」



시호의 의문에 시즈카가 손가락으로 문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가 프로듀서가 사는 방인데…불이 켜져 있어」



시호는 시즈카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201호라는 번호가 달린 문. 그 문 옆에 달려있는 창문에서 시즈카가 말한 대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프로듀서씨가 깜박한 거 아냐?」


「절대 아니야」


「절대?」


「시호, 너도 알잖아. 프로듀서가 강박증이 심한 거. 프로듀서는 방에서 나올 때마다 불이 꺼졌는지, 가스는 잠갔는지, 무언가 켜놓고 가는 건 없는지 두, 세 번씩 점검한단 말이야. 절대 프로듀서가 깜박한 건 아냐


「……」



시호는 시즈카를 향해 네가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아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을까?」


「꿈도 꾸지 마, 시즈카」


「어째서?」


「우리가 어떤 신분인지 잊은 거야? 우리는 아이돌이야. 저기는 프로듀서씨 방이고. 경찰을 불러서 도둑을 잡았다 치자. 그럼 그 다음에는? 아이돌인 우리가 왜 프로듀서씨 집에 있었냐고 물으면 뭐라고 할 건데? 바로 스캔들 직행이야. 물론 우리는 폭우를 피해서 어쩔 수 없이 갔었던 거라 이유를 댈 수 있겠지. 분명한 사실이고 말이야. 하지만 언론과 대중에게 그건 전혀 중요치 않아. 우리가 프로듀서씨 집에 있었다는 그것만이 중요하지. 그렇게 되면 우리와 프로듀서씨는 예능계에서 퇴출 되고, 765 프로덕션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질 거야. 절대 안 돼. 차라리 프로듀서씨가 재산을 잃는 게 훨씬 더 싸게 먹힐 거야」


「…하긴…방에는 귀중품도 없으니 그 편이 확실히 더 낫겠네」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는데? 시호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일단은 삼켰다. 굳이 지금 타박할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져보면 될 일이었다.



「일단 프로듀서씨한테 알리는 게 먼저일 것 같은데…큰일 났네. 프로듀서씨, 오늘은 더 이상 전화 올 곳이 없다면서 업무용 휴대폰을 사무소에 놔두고 왔다 했는데」


「걱정 마!」



시즈카가 휴대폰을 꺼내며 씨익 웃었다.



「내가 개인폰 전화번호를 알고 있거든! 내가 걸어볼게!」


「……」



시호는 어금니를 악물며 견뎠다. 나중에, 나중에…시호, 나중에 물어보면 돼…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며 떨리는 몸을 어떻게든 진정시켰다.


시즈카가 휴대폰을 꺼내고 전화번호부를 불러온다. 시호는 시즈카 몰래 화면을 곁눈질 하며 어떻게든 실마리를 얻으려고 각을 세우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가 이어지던 그 때



달칵



「!」


「!」



201호의 문이 열렸다. 


시즈카와 시호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린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그 때, 안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그럼 이제 일본주만 남은 건가? 으으, 젖기 전에 빨리 다녀와야지~」



시즈카와 시호는 호들갑을 떨며 201호에서 나오는 사람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시즈카도, 시호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리오씨?」」


「응? 어머나? 시호랑 시즈카잖아? 너희가 여기 무슨 일이니?」


「그건 저희들이 묻고 싶은 말이에요」


「리오씨가 왜 프로듀서 방에서…」



세 사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201호의 문이 다시 한 번 열렸다. 



「리오! 술을 사러가면서 지갑을 놔두고 가면 어떡해…어라?」


「코노미씨까지?」


「이게 대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루어진 예상치 못한 상봉. 예상치 못한 사태에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침묵이 흐르는 그 공간에서, 거센 빗소리만이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



「믿을 수 없어!」



시호는 지금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염원하던 P의 방에 왔지만 그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울컥거림에 마음을 진정 시킬 수가 없었다.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프로듀서씨도 그런 사람이었네요. 업계의 역겨운 어른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어요」



시호가 목소리를 드높였다. 떨리는 그 목소리가 지금 시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맨날 말로는 아이돌을 아낀다니, 소중히 한다니 해놓고…사무소에서는 사적으로 안 가까워지게 주의하고, 밖에서는 여성들이랑 거리를 둔다더니」


「앞에서는 그렇게 깨끗한 사람인 척 하면서, 뒤로는 자기 마음에 드는 아이돌을 집에 끌어들여 흥청망청 놀았다? 하!」



시호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여성용 속옷들과 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안주들을 가리켰다. 웬만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남의 집에서 이러한 행동이 가능할까? 여성이 남성의 집에서 이렇게 자기 집처럼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대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가슴 속에 담고 있는 그 감정 때문에 끙끙 앓고 있는 사이에 이 집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코노미와 리오를 포함해 대체 몇 명의 아이돌이 이곳을 방문했을까? 방문한 아이돌들은 상상하기도 싫은 그런 것을 P와 하고 있었을까?



「억울해…바보 같아…이 때까지 쌓아 온 모든 것을 부정 당한 느낌이야…」


「시호…」


「시즈카 너도 마찬가지야!」


「어?」


「너도 속으로 날 비웃고 있었지? 전전긍긍하는 날 보며 재밌다고 비웃고 있었겠지!?」


「시, 시호?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시끄러! 위선자! 그래, 전부 위선자야! 너나 프로듀서씨나 다 똑같아! 모두 위선자라고!」



참다 못해 폭주하기 시작하는 시호. 그런 시호를 보다 못한 리오가 나서려고 하던 그 때, 코노미가 리오의 팔을 잡아 세우고는 앞으로 나섰다.



「시호」


「…뭔가요?」


「너무 앞서가지 마. 지금 이 상황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니까」



코노미의 말에 시호가 코웃음을 친다.



「하! 지금 그 말을 저보고 믿으라고요? 제가 어리다고 해서 얕보는 건가요? 오해라고요? 이렇게 상황이 명백한데 지금 그런 추잡한 변명을 하는 건가요? 나름 765 프로덕션의 아이돌을 대표한다는 리더라는 사람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정치가랑 똑같은 행동을 하시네요. 조그만한 자리나 권위를 얻으면 다 그렇게 되는 건가요?」



시호가 자신을 삿대질하며 비웃었지만, 코노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한 시선으로 시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사과해」


「하아?」


「방금 오빠랑 시즈카한테 위선자라고 했던 거, 사과해」


「언니!?」



리오가 깜짝 놀라 황급히 코노미의 손을 잡았지만 코노미는 그것을 뿌리쳤다.



「오빠? 오빠라고요?」



시호의 입꼬리가 더더욱 올라간다.



「아니아니, 이거 진짜 재밌네요」


「불난 곳에 기름을 부으시는 것이 취향이신가 보네요. 얼마나 깊은 관계를 가졌으면 오빠라고 다정하게 부를 정도인가요? 아니면 그 사람이 그렇게 불러달라고 하던가요?」


「그 사람은 그런 취향인가 보군요? 오빠? 크큭. 오빠라니…오빠…오빠? 저도 그 사람을 오빠라고 부르면 귀여워해 주려나요. 아니, 어쩌면 침대에서 귀여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도? 그러면 일도 더 많이 받고?」


「시호!」



리오가 소리쳤다. 아무리 화가 났다지만 시호의 발언은 선을 넘는 것이었다.



「뭔가요. 혹시 제가 정곡을 찔렀나요? 갑자기 화를 내는 것 보니 그런가 보네요. 사람은 할 말이 없으면 일단 화부터 내고 본다던데」


「크큭. 정말 웃음 밖에 안 나오네요. 그러고 보니 코노미씨…당신 분명 키 때문에 어린 아이 취급 받는 걸 싫어하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그 남자랑은 그런 플레이를 하고 계셨던 건가요? 어머나, 소름끼쳐라. 사무소에서는 근엄한 척, 진지한 척, 싫은 척 하면서 둘이 있을 때는 그렇게 아양을 떨었던 건가요. 정말…역겨워」



시호가 비웃으며 조롱을 했지만 코노미의 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팔짱을 끼며 당당하게 시호에게 말했다.



「글쎄…오빠라는 호칭이 딱히 문제 될 건 없을 것 같은데?」


「문제가 없다…뻔뻔하기 짝이 없네요」


「뻔뻔하다라…그럼 한 가지만 물어볼게, 시호」


「친오빠를 오빠라 부르는데 뭐 잘못 된 거라도 있을까? 만약 잘못된 게 있다면 가르쳐 줬으면 하는데?」


「하아?」


「언니!? 그것까지!?」


「…코노미씨?」



코노미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리오는 경악하고 시호는 얼굴을 찡그리고 시즈카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리오는 당황하여 코노미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언니! 그건 프로듀서군이 끝까지 비밀이라고 했는데!」


「어쩔 수 없잖아. 이대로 놔두면 시호는 오늘 일을 두고 평생을 후회할 거라고」


「그래도!」


「상황이 상황이야. 어쩔 수 없어.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코노미와 리오를 보고 시호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변명을 하려면 좀 더 그럴 듯한 변명을 하세요. 뭔가요? 그 궁색스러운 변명은? 갑자기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누가 믿어줄 것 같나요?」


「그, 그래요. 갑자기 그런 걸 믿으라는 건…」



시호의 말에 시즈카도 동의한다. 두 사람의 의견은 틀린 것이 없었다. 갑자기 우리는 사실 남매요, 그렇게 말해봤자 믿기도 어려웠고 궁색한 변명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럼 확실한 증거가 있으면 믿어주는 거지?」


「있다면 말이죠. 물론 급조한 변명일 테니 그런 건 존재할 리가 없겠지만」



시호의 말을 무시하며 코노미는 책장으로 다가갔다. 책장을 살피던 코노미는 이내 찾던 것을 발견하고 책장에서 그것을 꺼내들었다.



「이것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지」


「언니, 그건…」


「그래. 가족 앨범이야」



코노미가 책장에서 꺼내든 것. 그것은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열쇠이자 폭탄 그 자체였다.






「죄송합니다」



코노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으며 사과하는 시호를 보고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사과를 하라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하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아니요. 이것으로도 부족해요. 아무리 정신이 나갔었다고는 하지만 대체 무슨 짓을…」



그대로 고개를 들어 바닥에 머리를 찍으려는 시호를 리오가 말린다.



「그만해, 시호. 언니도, 나도, 시즈카도 모두 용서했잖니」


「하지만…하지만…」



시호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진다.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답답해져 숨이 멈출 것 같았다.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그곳에 들어가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거야. 실수에 너무 얽매이지 마, 시호. 그러고 보니 이 말은 오빠가 너한테 이미 해줬을 텐데? 실수에 얽매일수록 더 큰 실수를 하게 된다고」


「네…」


「그러니 일어나. 이러다 오빠가 들이닥치면 뭐라 변명도 못해. 꼭 우리가 시호 너를 괴롭히고 있는 것 같이 보이잖아」


「……」




코노미의 그 말을 듣고서야 시호는 바닥에서 일어났다.



「흐~응. 그러고 보니 이 가족 앨범도 오랜만에 보네. 그리워라」



리오가 앨범을 팔락팔락 넘기며 그립다는 얼굴로 말했다. 앨범에는 수많은 사진이 있었다. 란도셀을 멘 P의 초등학교 입학으로 시작한 사진은 세라복을 입은 리오의 고등학교 졸업 사진으로 끝이 나있었다.



「아. 너무 귀엽잖아, 정말. 조그만 해서는. 이때만 해도 이렇게 귀여웠는데 말이야」



P의 소풍, 체육대회, 문화제 사진들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리오가 아련한 듯 말했다



「아, 언니! 이 사진 봐봐. 이거 기억나?」


「보자~. 오, 이 사진이 남아 있었네. 정말이지…」



리오가 내민 사진을 본 코노미가 말끝을 흐린다.



「저기…」


「응? 왜, 시호?」


「제가 생각해도 염치없다고 생각하지만…저희들도 그 사진을 볼 수 있을까요?」


「시호…내가 아까 뭐라고 했어. 얽매이지 말라고 했잖아. 흠…보는 건 상관없는데 너희들 뭐 잊은 거 없어?」


「잊은 거요?」


「그래」



코노미가 손가락으로 시호와 시즈카를 가리킨다.



「너희들 여기 들어와서 수건으로 대충 닦기만 했잖아. 그대로 있으면 감기 걸릴 텐데? 에어컨 온도를 올려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아…」



그제서야 시호와 시즈카는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젖어서 몸에 딱 붙은 옷, 드러나는 몸매와 비치는 속옷 그리고 찝찝함과 에어컨으로 인한 추위. 난리를 피우느라 미처 느끼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자각을 하고나자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일단 씻고 오도록 해. 음…근데 겉옷은 어떻게든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속옷은 어쩌지?」


「속옷은 프로듀서가 사서 온다고 했어요」


「그래? 그럼 일단 겉옷만 해결하면 되겠네. 욕실이 그렇게 넓지는 않은데 같이 들어갈 거야?」


「목욕을 할 거도 아니니 둘이 들어가서 빨리 씻고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 시호?」


「난 혼자가 좋은데?」


「안 돼」



시즈카가 단호하게 거절하고 방긋 웃는다. 



「어째서?」


「이유는 나 스스로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대로 널 혼자서 욕실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칫. 쓸데없는 곳에서 감이 좋다니까」


「시호?」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서두르자. 프로듀서씨가 오기 전에 모든 걸 끝내둬야지. 아니면 아무리 프로듀서씨라고 할지라도 화를 낼 거야」


「그래」



코노미가 내어준 수건을 각각 하나씩 들고 욕실로 향하는 시호와 시즈카. 시호는 가는 도중 수건을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아보았다. 향긋한 유연제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시호는 그 냄새를 절대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듯 수건을 코로 누르며 욕실로 들어갔다.






「…우리 사무소 괜찮은 걸까?」



시호와 시즈카가 욕실로 들어가자 코노미는 한숨을 쉬며 그렇게 말했다.



「이제 와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의아하게 코노미를 바라보는 리오.



「오빠, 사무소를 그만두게 하는 게 좋을지도」


「언니!?」



리오가 깜짝 놀라 코노미의 양어깨를 잡는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언니!」


「하지만 이대로 놔두면 오빠가 너무 위험할 것 같단 말이야. 방금 시호가 보여준 행동 못 봤어? 코를 수건에 깊게 묻은 그 모습을? 시호는 분명 수건에서 풍기는 그 냄새를 단서로 해서 유연제의 메이커를 알아낼 게 틀림없어. 저런 행위, 나 인터넷에서 광팬들이 하는 건 봤는데 설마 현실에서 실제로 볼 줄은 몰랐어. 사실 저것만 해도 무서운 건데 사무소에는 치하야를 시작으로 코토하까지 시호를 능가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단 말이야. 지금이야 음지에서만 움직이고 있다지만, 이러다가 폭주하는 아이라도 나오면…」


「……


「아까 시호의 감정이 폭발한 거 봤어? 물론 원인과 경우가 다르기는 하지만, 오빠가 다른 여자랑 맺어졌을 경우 애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까 시호의 행동으로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다고 생각해」



코노미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P는 765 프로덕션의 아이들이 모두 착하며 노력가에 동료를 가족과도 같이 여기는, 요즘 시대에 찾기 어려운 아이들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특히 P와 오랫동안 활동을 같이 해온 올스타 멤버 쪽에는 위험인물들이 한가득 했다. 항상 앞에서 애정을 갈구하는 미키는 아주 건전한 편이었다. 사무소 뒤에서 자신을 두고 펼쳐지고 있는 쟁투를 P가 알게 된다면, 과연 P는 어떻게 반응할까? 



「…언니, 그러니까 더욱더 프로듀서군을 이곳에 두어야 해」


「……」


「사실 언니도 알고 있잖아?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프로듀서군이 사무소를 떠나는 순간…그 아이들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벽인 프로듀서와 아이돌의 스캔들이라는 장벽이 사라져 버려. 그럼 그 순간 그 아이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게 돼. 그 순간부터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서게 될 거야. 그러니 프로듀서군은 사무소에 그대로 놔두는 게 제일 안전할 거야. 그리고 프로듀서군이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 걸 만족스러워하고 있는 이상, 아무리 언니의 의견이라도 프로듀서군을 사무소에서 나가게 만들기는 힘들걸」


「그래…그렇겠지. 미안, 리오. 그냥 푸념이었어. 어째 오빠 주위에는 위험한 여자들이 많이 꼬이는 것 같아서」


「위험한 여자들이라…사무소 말고 또 누가 있었지?」


「기억 안 나? 하코다테 자매」


「아…」


「그 자매도 좋은 사람들이기는 했는데, 어째 오빠랑만 관련 되면 사람이 휙휙 바뀌었지」


「생각 나…특히 동생 쪽은 정말 무서웠었지…사무소 아이들은 그 여자랑 비교하면 애들 장난일지도 모르겠어. 그걸 다 받아준 프로듀서군도 대단했었지만…뭐, 그 정도 멘탈이니 이 프로덕션에서 프로듀서를 하고 있는 걸지도」


「그렇구나…이제 와서는 그 자매도 추억으로 남은 그리운 이름이네. 프로듀서군한테 애인이 생겼다고 했을 때는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리오가 먼 산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천장을 쳐다본다.



「그런 것 치고는 자주 어울려 다녔었지?」


「대체 그 여자의 어떤 부분에 프로듀서군이 빠졌는지 알아내려고 같이 다니긴 했었지. 쿡쿡」



둘이서 마주 보고 웃는다. 



「그럼 옷을 찾아볼까. 시호랑 시즈카를 알몸으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코노미가 옷장을 연다. 그곳에는 의외로 옷이 한가득 있었다.



「못 보던 옷들이 많이 생겼네. 오빠가 이렇게 옷을 많이 사던 타입이었던가?」


「휴일에도 정장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잖아. 절대 그럴 리 없지」


「오빠라면 안 고를 밝은 색 옷도 많이 생겼고…이거 우리 몰래 여친이라도 만든 거 아냐?」


「아하하. 언니도 참 재밌는 소리를 하네. 언니도 알잖아. 이 업계랑 사무소가 얼마나 사람을 쥐어짜는지. 여자를 만날 시간이나 있겠어? 거기다 프로듀서군은 직업상 주변에 아이돌이라는 매력적인 여자들이 넘쳐대잖아? 웬만한 여자는 불안해서 못 버틸걸? 아마 프로듀서군이랑 사귀려면 인내심과 멘탈이 부처님 수준이어야 할 거야」


「…그건 그렇네」



코노미는 씁쓸하게 웃었다. 업계 자체가 그러했다. 주말이 따로 있지 않았고 휴일도 보장할 수 없으며 밤낮이 바뀌는 건 기본이었다. 



「오빠도 어쩌다 이런 업계에 들어온 건지…」


「듣기로는 사장님이 끌어들였다고 하던데? 보는 순간 팅하고 왔다던가?」


「그건 그 사람 레퍼토리잖아. 뭐 성공률은 높으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응? 이건 니플 패치? 이런 걸 대체 왜 들고 있는 거야」


「요즘은 남자들도 많이 쓰잖아. 아니면 일 때문에 가져왔다가 깜빡한 걸지도?」


「오빠가 그렇게 남의 눈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닐 텐데…뭐, 됐어. 내가 신경 쓸 바 아니지. 마침 잘 됐네. 애들한테 이걸 쓰라고 하면 되겠다」


「언니, 옷은 골랐어? 아직 못 골랐다면 우리 재밌는 거 해보지 않을래?」


「재밌는 거?」


「응. 방금 떠올랐는데 애들한테 와이셔츠만 입혀보는 건 어떨까? 이른바 알몸 와이셔츠! 우리까지 그렇게 입고 프로듀서군을 맞이하면 프로듀서군이 놀라서 허둥지둥 하지 않을까? 어때? 재밌을 것 같지 않아?」


「……」


「언니?」


「리오…난 네가 오빠한테 혼나는 그림 밖에 안 떠오르는데…오빠가 동정 중학생도 아니고 그런 걸로 당황하겠어?」


「그, 그럴까? 그럼 이건 어때? 프로듀서군이 들어오면 확 벗어버리는 거야. 그러면-」


「리오~~~~~~!」


「아야! 아야야! 언니, 이러다 두개골 깨져! 아니, 진짜로 깨진다니까!」


「언니는 슬퍼…리오는 왜 이렇게 바보로 자란 걸까」


「앗! 그 말 이틀 전에 프로듀서군한테도 들었는데!」


「어지간히 바보라야 말이지…」


「너무해!」



리오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



「자자, 거짓 울음은 안 통하니 그만하시고요. 그럴 시간이 있으면 옷 찾는 거나 도와」


「…응…」



최후의 수단까지 막혀버린 리오는 결국 코노미 옆자리에 합류해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즈카는 바닥에 놓인 옷들을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옷들을 고른 연유가…」



시즈카가 옷을 들어 보인다.



「그것 때문이라는 건가요」



손에 든 검은색 와이셔츠에서 눈을 떼고 코노미와 리오를 쳐다본다. 코노미가 면목 없다는 듯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웃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궁금한 거야. 과연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그렇다고 해서 이런 파렴치한 복장을 저희에게 강요한다는 건가요?」


「뭐, 꼭 입으라는 건 아니야. 너희들이 동의를 한다는 전제하에서 한다는 거지」


「하아…동의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지, 시-…시호!?」



시호에게 동의를 구하려고 고개를 돌린 시즈카는 경악했다. 시호는 이미 와이셔츠를 입고 거울을 보며 포즈를 잡는 중이었다.



「시, 시호! 너 대체!」


「응? 무슨 문제 있어?」


「문제투성이야! 너 설마 진짜로 그렇게 입을 작정이야!?」


「문제없잖아. 검은색이라 비치지도 않고 니플 패치를 붙여서 도드라지는 것도 아니고 속옷을 안 입으니 해방감도 느껴지고. 그것보다 시즈카, 단추는 몇 개를 푸는 게 좋을까. 2개? 3개? 아니면 진짜 아슬아슬하게?」


「전부 다 잠가! 아니, 그것보다 최소 바지는 입어! 그렇게 움직이면 다 보이잖아!」


「여자끼리 있는데 뭐 어때?」


「시호!」



투닥거리는 시호와 시즈카를 보며 리오는 재밌다는 듯 말했다.



「저 둘도 참 많이 변했다니까. 특히 시호. 지금의 시호를 보면 입사 초창기의 그 시호랑 동일인물인지 의심이 간다니까」


「…좋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언니도 참. 프로듀서군이랑 얽히지만 않으면 시호는 정말 괜찮아졌어」


「그게 제일 문제인데 말이지…」



코노미가 한숨을 쉬었다. 



「자자, 시호랑 시즈카도 그쯤하고. 앨범 안 볼 거야?」


「아, 맞다」


「그래서 옷은 어쩔 건데? 그렇게 입을 거야?」


「전 상관없어요」


「상관없기는! 코노미씨, 잠시 실례할게요!」


「난 진짜 상관없다니까?」


「최소 바지라도 입어! 와이셔츠는 어찌됐든 이것만은 양보 못해!」


「하아…알겠어」



시즈카와 시호가 침실로 들어가 옷장을 열고 뒤적인다. 결국 시즈카는 운동복을, 시호는 바지를 입게 되었다. 



「어머, 그 옷으로 하게?」



시즈카가 입은 운동복을 보고 따라들어 온 리오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딱히 문제는 없는데…」


「없는데?」


「그 옷, 프로듀서군이 잘 때 잠옷 대용으로 입는 옷이거든. 뭐, 옷장에 있는 거 보니 세탁은 한 것 같고,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그래요? 그렇다면 딱히 문제없지 않-」


「있어」



시즈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시호가 잽싸게 접근해 옷을 잡고 늘어졌다.



「꺄악! 시호!?」


「시즈카. 나 마음이 바뀌었어. 이런 꼴로 프로듀서씨 앞에 선다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하아? 방금 전에는 괜찮다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닌 것 같아. 그러니 시즈카…그 옷을 나에게 넘기지 않을래?」


「옷장에 옷이 많은데 왜 굳이 이걸…시호 너 설마…」


「아니야, 시즈카. 결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결코 왜 너만 프로듀서씨랑 그렇게 엮이는 걸까 하고 질투하는 게 아니고, 결코 잠옷을 먼저 생각해내지 못한 나한테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결코 그 옷을 입고 프로듀서씨가 어떤 기분으로 자는지 느껴보고 싶은 게 아니야. 응. 결코 아니야」



거기까지 말하고 풀이 죽어 시선을 아래로 향하는 시호. 여기서는 매몰차게 거절해야 한다는 걸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시호의 표정을 보고는 도저히 감정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아…알겠어」



시즈카는 한숨을 쉬고 옷을 벗어 시호에게 건넸다. 옷을 받은 시호는 와이셔츠를 집어던지고는 재빨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그 감촉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 옆에 있는 침대로 뛰어들었다.


눈을 감고 고양이 입술을 한 채 얼굴을 베개에 비비는 시호. 그런 시호의 모습을 보고 시즈카는 쓴웃음을 한 번 지은 뒤 다시 옷장을 훑어보았다. 대충 훑어본 시즈카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옷은 많았으나 실내복으로 쓰기에 적합한 옷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옷이 없어?」


「아, 리오씨. 네. 한 번 훑어봤는데 보이지를 않네요」


「음…그래? 잠시만…」



리오가 옷장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던 시즈카는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걱정스럽게 말했다.



「저기…리오씨」


「응? 왜?」


「이제 와서 이 말을 하는 것도 그렇긴 한데…이렇게 마음대로 침실에 들어와서 옷장을 뒤져도 괜찮은 건가요?」



시즈카의 말을 들은 리오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말을 하나 싶었는데…괜찮아, 괜찮아. 전자기기만 안 건드리면 돼. 프로듀서군, 그거는 정말 싫어하거든. 응, 이게 좋겠다」



리오가 옷을 들어 보인다. 색이 바랜, 딱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체육복이었다.



「이거 프로듀서군이 고등학교 때 입던 체육복」


「고등학생요!?」



시즈카가 놀라 목소리를 높인다. 침대를 뒹굴던 시호가 벌떡 일어난다.



「프로듀서군, 이런 추억 어린 물건 버리는 거 싫어하거든. 응, 냄새도 안 나네. 주기적으로 세탁하고 있으니 괜찮을 거야」



리오가 옷을 내민다. 시즈카는 옷을 받아 가만히 쳐다보았다. 자신과 같은 나이의 P가 입던 체육복.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마음에 안 들어? 다른 걸 찾아줄까?」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리오의 말에 시즈카는 허둥지둥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응. 지금 봐도 센스가 없네. 자주색이라니, 누가 생각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시즈카는 팔을 들고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베이지색 윗도리와 자주색 바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시즈카가 옷을 접어 자신의 체격에 맞춘 뒤 거실로 나가려던 그 때, 뒤에서 뻗어나온 손이 시즈카의 손을 붙잡았다. 시즈카는 한숨을 한 번 쉬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호…」



볼을 약간 부풀린 시호가 시즈카의 팔을 잡고 있었다. 불만이 가득 담긴 시호의 눈을 보고 시즈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시즈-」


「안 돼」



시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단하는 시즈카.



「아직 말을 꺼내지도 않았잖아」


「안 들어도 알 수 있어. 어차피 이 옷을 달라고 하는 거겠지. 이번에는 안 돼. 나도 겨우 찾은 옷이니까. 어리광은 그만 피우도록 해」


「그래, 그래. 그것까지 뺏으면 시즈카는 뭘 입고 있으라는 거야, 시호. 설마 속옷 차림으로 있으라는 건 아니겠지? 프로듀서군 침대까지 맛 봤으니 오늘은 이만 만족하도록 해. 과유불급이라는 말도 있잖아?」


「저기…지금은 그 말을 쓸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후후. 그런 사소한 것에 얽매이면 노화가 빨리 온단다, 시즈카. 이런 때는 가볍게 넘어가야 하는 거야. 그리고 시호. 이걸로 만족하렴」



리오가 시호를 향해 무언가를 던진다. 그 무언가를 받은 시호는 손바닥에 올려놓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건…」


「옷장 구석에 있더라. 정말 물건 버릴 줄을 모르는 사람이라니까」


「학생수첩?」


「의외로 재미난 게 많을 수도 있어. 한 번 훑어볼 가치는 있을 거야」


「이런 건 민감한 개인정보 아닌가요? 아무리 그래도 선은 지켜야…」


「노노. 걱정하지 마. 나도 옛날에 본 적이 있고 딱히 민감한 요소는 없어. 그러니 시호한테 넘기는 거고…」


「그래도…」


「시즈카,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사소한 것에 너무 신경 쓰면 노화가 빨리 온다니까. 자, 이제 대충 정리됐으면 빨리 나가자. 코노미 언니가 화내겠다」



리오가 양팔을 흔들며 상황을 정리한다. 시즈카는 미묘한 표정으로, 시호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방을 나섰다.







시호와 시즈카, 리오가 침실에서 나오자 코노미가 앨범을 들고 와 바닥에 놓았다. 네 사람은 그 앨범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앉아 앨범의 감상을 시작했다.



「아까 말하셨던 사진이…」


「이 사진이야. 오빠가 나를 업고 있는 사진」


「코노미씨는 등에 업혀 자고 있네요. 리오씨는 프로듀서의 팔을 잡고 있고」


「이 날 공원에 두 가족이 꽃놀이를 하러 갔었어. 신나게 놀다가 내가 넘어져서 펑펑 우는데, 오빠가 그칠 때까지 나를 업고 돌아준 거야. 리오는 자기도 해달라고 조르는 거고」


「프로듀서씨가…」


「프로듀서군, 철이 들었을 때부터 코노미 언니를 끔찍하게 아꼈으니까」


「끔찍하게 아끼기는 무슨.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아?」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봐. 다들 나처럼 말할 걸? 어떤 사람은 처음 봤을 때 커플인 줄 아는 사람도 있었어」


「하아!? 그 말은 처음 듣는데!?」


「두 사람, 키부터 시작해서 닮은 점이 거의 없-아야!」


「키 이야기는 그만!」

 


코노미한테 등을 맞아 울상을 짓는 리오를 보고 시호와 시즈카가 미소 짓는다. 그 뒤에도 감상회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건 오빠가 체육대회에서 달리기 1등 했을 때 사진이고…」


「이건 코노미 언니가 달리기를 하다 넘어진 사진이네」


「이건 리오가 빵먹기 경주를 하는 사진…」


「리오씨는 이 때도 가슴이 컸군요?」


「엣헴!」


「……」



가슴을 자랑스럽게 내미는 리오와 기가 죽는 코노미. 하지만 곧 리오도 풀이 죽으며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크면 뭐해. 정작 봐줬으면 하는 사람은 관심이 없는걸.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줄기차게 유혹을 해도 끝까지 넘어오질 않는 그 철벽에 정말 질려버렸다니까. 남자라면 한 번 혹할만 한데 말이야」


「뭐, 프로듀서는 리오씨 말대로 그쪽 방면으로는 철벽같은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저도 믿고 방에 올 수 있는 거고」



시즈카의 말에 시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즈카는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겠지만, 시호는 그 말에 자신이 주목할 만한 단어가 있다는 것을 바로 캐치했다. 


시즈카는 시호가 도끼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앨범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사진을 살피던 시즈카의 시선이 한 사진에서 멈췄다.



「이 사진은…」


「아, 내가 고등학교 때 찍은 사진이네. 발렌타인 초콜릿을 프로듀서군에게 주는 사진」


「초콜릿에 P군이라 적혀 있네요」


「그 때는 프로듀서군이 프로듀서가 아니었으니까. 뭐, 지금도 둘이 있을 때는 P군이라고 불러」


「그러고 보니…리오씨는 프로듀서를 부를 때 군이라는 호칭을 붙이시네요. 그러시는 이유가 있나요? 그 호칭은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한테 쓰거나 친구 사이에서 쓰이는 말이잖아요」


「음…그렇지…」


「그건 나 나름대로 프로듀서군이랑 대등해지고 싶다는 발버둥이려나?」


「발버둥?」


「어릴 때부터 옆집에서 살면서 서스럼없이 지내다보니, 프로듀서군이 날 동생으로 밖에 안 보니까. 그래서 마음을 자각했던 날부터 어떻게든 그걸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게 그 호칭이야. 뭐, 결과는 신통치 않지만」


「…그런 이야기를 저희한테 해주셔도 괜찮은 건가요? 프로듀서씨한테 마음이 있다는 이야기를…」


「뭐, 어때.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시호 너부터 시작해서」


「그건 그렇지만…」



시호는 감탄했다. P를 좋아한다고 당당히 말하는 리오의 그 기개가 감탄스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리오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해 아직도 쟁취하지 못한 그의 마음. 과연 자신이 쟁쟁한 라이벌들을 제치고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 불안했다. 



「……」



고개를 젓는다. 괜히 걱정과 불안을 떠안을 필요는 없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리오는 오히려 패널티를 안고 있음에도 저렇게 씩씩하게 그의 마음을 쟁취하려 하고 있었다.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었다. 



「그건 그렇고 오빠가 많이 늦는데?」


「비가 많이 와서 그런 거 아닐까요? 일단 차도 없이 걸어가셨으니…」


「무슨 일이 없으면 좋겠는데…비가 너무 많이 와서」



코노미가 창문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린 순간



철컥



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소리를 들은 리오는 웃으며 말했다.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더니…프로듀서군도 양반은 못 되나봐」


「그렇네요」



넷이서 마주보고 킥킥대며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거야?」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온 P가 어리둥절해 하며 묻는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보다 오빠」


「응?」


「어서 와」


「…그래. 다녀왔어」



P가 미소 지으며 코노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앗! 젖은 손으로 만지지 마! 겨우 다 말랐는데!」


「하하하! 이 녀석, 이 녀석!」


「앗, 차거! 오빠! 이럴 거야!?」


「야, 차지 마! 아파, 아프다고!」


「아, 프로듀서군! 바닥에 물이 다 떨어지잖아!」



항상 조용하던 공간에 오랜만에 소리가 넘쳐흐른다. 그 소리를 지워버리려는 듯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는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



「프로듀서, 왜 방에 코노미씨랑 리오씨가 있다는 걸 말씀 안 해주셨어요? 그것 때문에 얼마나 난리가 났는지 아세요?」


「하하, 그게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어서 꺼져있더라고. 보통 업무용 휴대폰을 쓰다보니 관리를 좀 소홀히 했거든. 나도 마트에 가서 알아채고는 편의점에서 급히 충전시켰어. 충전시키고 켜보니 코노미한테 비 때문에 방에 있다는 메시지가 와 있더라고. 앞으로는 조심할게」


「꼭 그렇게 해주세요」


「그리고 시호」


「네?」


「미안. 나 때문에 네가…」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혼자 착각하고 혼자 소동을 벌였으니까요.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시호가 고개를 숙인다. 



「고개를 들어, 시호. 이번에는 서로 잘못했다는 걸로 하고 넘어가자」


「하지만 저는…프로듀서씨한테…」


「충분히 그렇게 말할만 했지. 그러니 서로 신경 쓰지 말자고」



P가 웃으며 시호의 어깨를 두드린다. P의 미소를 보고 그제야 시호의 표정도 한결 풀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희들 옷은 그걸로 괜찮아? 둘 다 내가 입던 옷인데. 찝찝하지 않아? 옷 사왔는데 갈아입지?」



P가 짐을 가리킨다. 그 짐에는 시호와 시즈카를 위해 사온 옷이 들어있었다. 시호와 시즈카 모두 P가 사온 속옷은 입었지만 겉옷은 여전히 P의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이게 편해요. 혹시 입으면 안 되는 건가요?」


「아니, 시호가 편하다면 별로 상관없는데…그래도 내가 입던 거라 불쾌하거나 하지는 않아? 세탁은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편안한걸요」


「저도 상관없어요」


「그래? 너희들이 괜찮다고 한다면…」



시호와 시즈카가 괜찮다고 말하자 P는 물러섰다. 시호와 시즈카의 표정이 정말로 평온했기에 P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럼 이제 저녁을 만들어야겠네. 좀 많이 늦은 저녁이지만 그래도 그냥 잘 수는 없지」


「응? 프로듀서군, 그냥 이거 먹으면 안 돼? 식기는 했지만 다시 데우면 되는데」


「하아…」



리오가 상 위에 마련되어 있는 안주들을 가리키며 P에게 묻자, P는 이마에 손을 가져가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리오에게 다가가 관자놀이에 주먹을 대고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아야, 아야야!」


「리오…이건 너희들이 술을 먹을 때 먹으려고 만든 안주잖니. 즉 짜고 매운 것 투성이란 말이잖아. 너랑 코노미는 익숙할지 몰라도 아직 미성년자인 시호와 시즈카한테 이런 걸 먹이고 재웠다가 내일 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난 슬퍼…리오는 왜 이렇게 바보로 자란 걸까?」


「아야야! 또 그 소리! 아까 전에 언니한테도 들었단 말이야!」


「그럼 리오가 또 바보 같은 짓을 했었겠네. 그치? 코노미」


「응, 맞아」


「너무해!」



절규하는 리오를 무시하고 P가 시즈카한테 말한다.



「오늘은 사람이 많아서 혼자 만들려면 좀 힘들겠는데. 시즈카, 네 도움이 필요하겠는데…도와줄래?」


「당연하죠. 말씀 안 하셔도 도와드리려고 했어요. 우동이니까요!」


「그래그래」



리오를 해방시킨 P는 시즈카와 같이 우동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무슨 우동을 만드실 건데요?」


「비도 오고 하니 키츠네 우동을 만들어 볼까 싶어서 재료를 사왔는데…」



P가 말끝을 흐린다. 과연 자신의 선택은 옳았던 것인가. 우동만 관련되면 깐깐해지는 시즈카를 보며 P가 침을 삼켰다.



「비오는 날 키츠네 우동이라…괜찮네요. 점점 센스가 늘어나시는 것 같아요」


「그,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이번에는 무사히 넘어간 것 같네」


「?」


「신경 쓰지 마. 이쪽 이야기니까.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시즈카, 일단 대짜와 중짜 냄비를 꺼내서 물 좀 끓여줄래? 난 유부를 준비할 테니까


「네!」



그렇게 시작된 우동 만들기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시즈카는 P가 요구하는 것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했다. 식기, 조미료, 식재료 전부를 마지 제 집인양 전부 파악하고 있는 듯 시즈카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프로듀서, 육수는 그 칸에 있나요?」


「응. 그 칸에 있어. 이번 거는 맛있을지 모르겠네. 레시피를 좀 바꿔봤거든」


「후훗. 프로듀서가 그런 걱정도 하세요? 걱정 마세요. 프로듀서가 만든 거라면 분명 맛있을 테니」


「오~, 시즈카가 그렇게 말해주니 자신감이 솟는데?」


「네! 이때까지 그래왔듯이 분명 맛있을 거예요!」



P가 뚜껑을 열자 김이 솟아오른다. 에어컨이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지만 P는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프로듀서」


「응?」


「잠시 이쪽으로 돌아보세요」


「으응?」



P가 시즈카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즈카는 손수건을 꺼내어 P의 이마를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P는 그런 시즈카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마움의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 시즈카」


「아, 아니에요. 우, 우동에 땀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요」



P의 미소를 보고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시즈카. 



「아하, 그렇네. 내가 좀 생각이 짧았군. 나 혼자 먹는 게 아닌데 말이야」


「이제라도 아셨으면 됐어요」


「그래, 고마워」


「그럼 전 파를 썰도록 할게요」


「안 베이게 조심하고」


「당연하죠」



등을 돌린 시즈카는 양손을 뺨으로 가져가 감쌌다. 얼굴이 아직도 화끈거리는 게 양손을 통하여 전해져 왔다. 시즈카는 도저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몇 년 동안 수백 번은 봐왔던 P의 미소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 몸은 이런 반응을 보이는가.



「시즈카?」


「네, 넷!? 아, 죄송해요!」



뒤에서 들려온 P의 목소리를 듣고 시즈카는 황급히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의 냉기가 자신의 열기를 식혀주길 바라며 시즈카는 파를 찾기 위해 야채칸을 뒤적였다.




 



한편 뒤에 남겨진 세 명의 여성들은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P와 시즈카를 주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리오가 코노미와 시호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상하네」


「……」



마치 한 몸이라는 듯 움직이고 있는 P와 시즈카. P가 무언가를 요구하면 시즈카는 그 요구를 한 치도 틀리지 않고 100프로 정확하게 수행했다.



「요리라는 게 저렇게 한 번에 합을 맞출 수 있는 행위였나?」


「그럴 리 없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있는데 요리라는 건 고난이도 행위야. 사람을 다치게 만들 수 있는 기구와 불이라는 위험물, 거기다 이것저것 신경 쓸게 많으니 어설프게 도와주려고 하면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야. 단순히 공을 주고받는 야구의 배터리도 합이 맞는 사람과 안 맞는 사람이 있고, 합을 맞추려면 짧은 시간으로는 어림도 없는데, 요리는 말할 것도 없지. 거기다…」



코노미가 손을 들어 시즈카의 등을 가리켰다.



「시즈카는 오빠가 요구하는 걸 정확하게 수행하고 있어. 조미료와 식기의 위치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고. 오빠 집에 가끔씩 들르는 나도 전부 파악하고 있지는 못해. 우동을 만들 때 합이 잘 맞는 거야, 시즈카가 우동을 좋아하니 합이 잘 맞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저건 이 집의 식기와 조미료 위치를 전부 외울만큼 자주 와봤다는 이유 말고는 설명이 안 돼」


「……」


「뭐,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니 추측일 뿐이지만」



코노미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리오는 우려하는 눈길로 시호를 쳐다보았지만 시호는 눈이 가늘어진 것을 빼고는 의외로 차분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 시호를 건드리는 것은 벌집을 건드리는 것이라 생각한 리오는, 시호에게 묻는 걸 단념하고 다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P와 시즈카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은 어느새 마무리에 들어가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동을 앞에 두고 다섯 사람은 손을 모았다. 딱 봐도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우동을 보고 시호는 감탄했다. 우동이 이렇게나 시선을 빼앗는 음식이었던가?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와 시원한 에어컨, 우동에서 올라오는 김이 합작을 이루어 우동을 더욱 먹음직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



젓가락을 들어 우동으로 가져간다. 조심스럽게 몇 가락을 들어 국물이 튀지않게 천천히 입으로 가져간다. 면을 꼭꼭 씹어 면과 면에 배어있는 양념 그리고 즙을 맛본 뒤 숟가락으로 국물을 퍼 면과 함께 넘긴다.



「맛있어…」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때까지 먹어왔던 그 어떤 우동보다 젓가락을 가져가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우와, 프로듀서군 실력이 더 늘어난 것 같은데? 옛날에도 맛있었는데, 지금은 진짜 우동 장인이 만든 것 같아!」


「우동을 잘 만드는 두 사람이 같이 만들어서 그런가?」


「아, 아니에요. 전 진짜 옆에서 거들기만 했는걸요. 국물에서 면까지, 이 우동을 만든 건 프로듀서에요」



시즈카는 면을 한 번 더 건져먹은 뒤 고개를 들어 P를 바라보았다. 시즈카의 눈에는 마치 위인을 보는 듯 한 존경심과 경애심이 가득 차 있었다.



「대단하세요. 그 짧은 시간에 그 분의 맛을 다 흡수하셨네요. 대체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그 분?」


「요시다를 말하는 거야」



리오에 의문에 P가 답한다.



「요시다라면…야마다시 요시다씨?」


「그래, 그 놈. 모밀에 관한 거라면 기가 막힌 놈이지」


「요시다씨한테 갔다 왔었어? 프로듀서군 치사해! 혼자서 맛있- 어라? 잠깐만…」


「왜?」


「시즈카가 어떻게 요시다씨를 알고 있는 거야? 요시다씨는 프로듀서군 고향 친구고 지금도 고향에서 장사를 하고 있잖아」


「그러고 보니…」



여성들의 눈이 시즈카를 향한다. 리오와 코노미의 시선에는 순수한 의문만이 담겨 있었지만 시호의 시선에서는 이제 살의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시즈카는 아차 싶었다. 들뜬 나머지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허벅지를 꼬집으며 자신을 책망한다. 고개를 들어 시호를 바라보니 저 정도면 눈에서 레이저가 발사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묻힌다. 어설프게 넘어가려고 했다가는 묻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데리고 갔었어」


「오빠가?」


「하지만 프로듀서군, 사적으로 아이돌이랑 안 가까워진다고…」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그 말이 아이돌과 완전히 척을 지겠다는 말은 아니잖아. 노래, 춤 같은 기술적인 부분, 일정 같은 비즈니스 부분뿐만 아니라 아이돌의 멘탈 케어도 엄연한 나의 업무 중 하나야. 요시다네 가게에도 이미 시즈카뿐만 아니라 타카네, 히비키, 미키, 야요이, 히나타, 아카네 등 몇 명의 아이돌이랑 다녀왔어. 리오랑 코노미도 자주 가봤으니 잘 알겠지. 그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P의 말을 듣고 시즈카는 가슴이 조금 답답해졌다. P의 말대로라면 P는 오프 때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돌들과도 외출을 하고 있었고, 그 말은 곧 자신만 특별히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특별한 입장이 아니라 많은 아이돌 중 하나.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의 답답함이 더욱 심해졌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그 미지의 감각에 시즈카는 의문을 느끼며 그것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한편 시호는 P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곱씹고 있었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던 시호는 얼마 안 있어 그 이름들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부 숙녀협정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이야!’



숙녀협정 중 가장 중요한 조항. 오프를 이용해 P와 사적으로 교류하지 말 것. 물론 이 조항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은 없었지만 워낙 보는 눈이 많아 행동에 제약이 많이 가해지는 조항이었다. 시호는 어이가 없었다. 숙녀협정에 가입한 사람들이 그림의 떡을 쳐다보듯 P를 보고 있을 때, 얌전한 고양이인줄 알았던 아이돌들은 P를 이미 자신들 손아귀에 넣고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말이다.



「좋은 곳이긴 하지.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에 있어서는 그곳보다 좋은 곳을 찾기 어려울 거야」


「맞아요! 정말, 정말 멋진 곳이었어요」



시즈카가 동의한다. 가슴 앞에 손을 모은 시즈카는 눈을 감고 그 날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느릿하게 자신이 봤던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야마다시씨 가게에 갔었어요. 계절도 계절인지라 냉우동을 시켰었는데 정말 개운하다는 표현을 뜨거운 음식이 아닌 찬 음식을 먹고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고명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어요. 뭐랄까. 겉모습 보다는 맛으로 승부한다는 느낌? 면을 집어 입안에 넣었는데 씹을 때 느껴지는 그 쫄깃함이 시중에서 판매되는 면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어요. 특히 놀라운 건 씹으면 씹을수록 느껴지는 그 단맛이 정말…거기다 그 면을 금요일 때마다 무상으로 나누어주고 계시더라고요. 그리고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그 우동의 국물이…하아…」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는 시즈카. 입맛을 다시는 것을 보아하니 그 때 마신 국물 맛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건 말로 표현 못해요. 이건 정말…직접 먹어봐야 알 수 있어요」


「흠…요시다씨도 메뉴를 늘렸나봐? 모밀만 하는 것 아니었나?」


「질렸다고 우동에 도전해 본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좋은 기회다 싶어 시즈카를 데려갔던 거고. 뭐, 덕분에 좋은 경험이 된 것 같지만」


「시즈카를 보아하니 환상의 맛이었나 보네. 그리고 거기서 우동만 먹고 끝내지는 않았지? 우동만 먹고 돌아오기에는 아까운 곳인데…」



코노미가 말하자 시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동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바로 옆에 있는 산림욕장에 갔었어요」


「프로듀서군이 고민이 있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가는 그곳이네」


「좋은 곳이었어요. 도시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푸른 산림과 공기 그리고 분위기. 정말 제가 지금 일본에 있는 걸까 싶을 정도였어요. 거닐면서 프로듀서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이때까지 있었던 일, 현시점에서의 문제, 제가 가지고 있는 강점과 보충해야 할 점,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계획. 그리고 거기서 프로듀서가 영감을 받아 지었다는 시를 들려주는데…」


「아아앗, 시즈카! 그건 비밀이라고 했잖아!」


「시? 프로듀서군이 시도 썼던 거야? 뭔데, 뭔데? 나도 들려줘!」


「에이잉! 리오 떨어져! 시즈카도 그 부분은 넘기고!」


「아쉽네요. 전 꽤나 좋은 시였다고 생각하는데…프로듀서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넘어갈게요. 산림욕장에서 그렇게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나눈 뒤 차를 타고 바다에 갔었어요. 거기서 해안가를 거닐고 가게에 들어가 싱싱한 해산물도 먹었고…정말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는 시즈카. 시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듣자하니 이름만 멘탈 케어지 데이트나 다름없었다. 그런 데이트 같은 것을 시즈카뿐만 아니라 다수의 아이돌이 경험을 했다…시호는 얼마 전부터 생각해오던 그것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많은 적을 만들게 될 지도 모르지만…어차피 목적을 위해서라면 지금은 아군일지라도 나중에는 적이 될 관계였다. 마음의 가책은 있지도 않았다.






「흠…」



P는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식사도 끝냈으니 이제 잠에 들 시간. 바로 자리를 배분하는 시간이었다.



「원래라면 내가 거실에 자고 시호랑 시즈카를 방에서 재우려고 했는데…코노미랑 리오가 가끔 묵어가니 이불도 충분했고 말이야. 그런데 계획이 꼬여버렸군」


「그렇네. 그럼 인원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나?」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시호가 손을 든다. 하지만 시즈카는 그 손을 잡고 강제로 내려버렸다.



「무슨 짓이야?」


「어차피 시호 네가 프로듀서랑 같이 자겠다고 할 거잖아? 절대 안 돼」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도」


「어째서…」



시호가 풀이 죽는다. 그런 시호를 아랑곳하지 않고 시즈카는 손을 들었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남매인 프로듀서와 코노미씨가 방에서, 리오씨와 저 그리고 시호가 거실에서 자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응, 그게 가장 좋겠네. 논란도 없고 불만도 없고」


「이의-」


「그럼 그렇게 결정!」


「……」



시호가 말을 다하기도 전에 코노미가 박수를 치며 상황을 정리한다. 또 다시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는 시호. 그런 시호를 시즈카가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등을 한 번 쓰다듬은 시즈카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시호…너 브라는?」


「…니플 패치를 했으니 세이프야」


「…한순간이라도 너를 안쓰럽게 여겼던 내가 바보였어」



시즈카가 한숨을 쉬며 일어선다. 자신도 도울 것이 없을까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 때



딩동



벨이 울렸다.



시즈카가 고개를 돌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본다. 

밤 12시. 결코 사람이 방문할 시간은 아니었다. 시즈카가 고개를 돌려 시호를 바라본다. 시호도 시즈카를 올려다보았다. 방문자가 누구든 자신들이 이곳에 있다는 걸 들키는 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



벨 소리를 들었는지 P가 방에서 나와 손가락으로 신발을 가리킨 뒤 방을 가리켰다. 시호와 시즈카는 고개를 끄덕인 뒤 신발과 짐을 들고는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가니 코노미와 리오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이 시간에 누구일까요?」


「몰라. 하지만 이 시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방문한걸 보면 아주 친한 사람이거나 아주 모르는 사람, 둘 중에 하나겠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P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방에 흩어져있는 자신들의 흔적을 없애는 듯 했다. 시호는 문으로 다가가 문에 귀를 한 번 대보고는 문을 소리 없이 살짝 열었다.



‘시호!?’



시즈카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호는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뒤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대체 무슨 짓이야!’


‘생각보다 방음이 잘 돼서 목소리가 잘 안 들려. 시즈카 너도 궁금하지 않아? 이 시간에 프로듀서씨를 찾아온 사람이 누구일지’


‘그, 그거야 궁금하긴 하지만…’


‘우리가 전혀 몰랐던 프로듀서씨의 사생활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회야.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그렇게 말하며 시호는 스위치를 내렸다. 순식간에 방이 어두워지며 비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와 숨소리, 그리고 거실에서 P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만이 남게 되었다. 바깥에서 문 안을 살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네, 갑니다」


「빨리 열어, P! 덥단 말이야」


「!!」



문밖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시호를 다시 한 번 말리려던 시즈카도, 침대에 앉아 시호와 시즈카를 조용히 지켜보던 코노미와 리오도 재빨리 문에 달라붙었다.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하지만 체인을 풀지 않았기에 문은 열리다 멈추고 말았다.



「네, 네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오늘 출장이라 하지 않았어?」



당황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느껴지는 P의 목소리.



「출장지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취소. 홍수도 나고 난리도 아니래. 그래서 내일 출근도 안 하고 재택근무에 비도 오니 술 한 잔 하려고 왔지. 그런데 왜 체인은 안 풀었어? 더우니까 빨리 들여보내줘」


「으음…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면 안 될까?」


「응? 왜?」


「나도 이제야 막 퇴근했거든. 거기다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출근을 해야 한다고? 내일도 시간당 80mm는 온다던데?」


「이미 계약한 일들이 있는데다 너처럼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직종도 아니라서. 미안」


「흐~응.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 좋다고 P를 힘들게 할 수는 없으니. 알겠어. 그럼 오늘은 돌아가 볼게」


「미안. 나중에 내가 꼭 한 턱 쏠 테니까」


「오케이, 오케이. 기대하고 있을게」



그렇게 문 밖의 여성이 돌아가기 위해 등을 돌리려던 순간



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무언가 둔탁한 것들이 구르는 소리가 P의 뒤에서 울려 퍼졌다. 등을 돌리려던 여성은 동작을 멈추었고 P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이, 이거 쌓아뒀던 골판지 상자가 무너진 모양이네. 연이은 비 탓에 습도가 높아서 그런가 보다. 빠, 빨리 정리해야겠다. 그럼 이만!」



P가 재빨리 문을 닫으려고 하던 그 순간, 갑자기 난입한 발로 인해 P의 의도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 그러셨어요? 요즘 골판지 상자는 입이 달려서 비명도 지르나 봐요?」


「그, 그걸 넣어놨거든! 비명 지르는 닭! 너도 알지? 한 때 유행했잖아!」


「헤에~, 난 본 적이 없는데 한 번 보여주면 안 될까?」


「정리를 해야 하니 나중에 다시-」


「닥치고 열어」


「…네」



불을 뿜는 듯 한 여성의 시선에 체인을 풀기 위해 문을 닫은 P는, 방으로 후다닥 들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3